우리 돈으로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을 성인 국민(어린이는 월 78만 원)들에게 제공한다는 파격적 안이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5일 부결됐다. 부결은 스위스에서 됐는데, 신이 난 건 한국의 보수 언론들이다. 주요 보수 언론들은 ‘스위스 국민들, 포퓰리즘에 철퇴’ 식의 제목으로 이 기사를 비중 있게 다뤘다.
‘모르면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옛 선현들의 말씀이 새삼 생각이 난다. 하긴, 기대할 일도 아니었다. 기사를 읽어보면 그 기자들은 평소 기본소득에 대한 고민을 단 1초도 안 해본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 상태에서 기사를 쓰는데 어떻게 스위스의 기본소득 부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스위스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서 제일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기본소득 제안이 부결됐는가?”가 아니다. 이걸 보고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지극히 정상적인 질문은 “왜 스위스는 기본소득을 무려 월 300만 원으로 설정했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 유수의 언론들은 이번 부결의 가장 중요한 두 원인으로 △재원 마련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와 △높은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걱정을 꼽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만약 스위스가 우리의 상식에 가깝게 기본소득을 월 100만 원 정도로 책정했다고 치면 이 제안이 부결됐을 것 같은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번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투표자들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여론조사 결과가 있었다. 반대투표를 던진 이들 중 대다수가 “25년 뒤에는 기본소득 안이 통과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찬성 투표자들 중 대다수는 이 기간을 15년 뒤로 내다봤다. 그리고 찬반을 막론하고 대부분 투표자들은 기본소득 제안을 놓고 몇 년 뒤에 다시 투표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위스 국민들은 기본소득 제도를 언젠가는 실시하게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 이만한 금액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왜 스위스는 첫 번째 시도부터 월 300만 원이라는 무리한 금액을 설정했느냐는 것이다. “물가가 비싸서”라는 답은 정답이 아니다. 아무리 물가가 비싸도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은 과하다. 연봉으로 따지면 3600만 원, 결혼만 하면 무조건 연봉이 7200만 원이다. 스위스라고 달걀 하나에 1만 원씩 파는 게 아니다. 2인 부부가 연 7200만 원을 무상으로 얻는다면 충분히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기본소득 제도의 특징에서 찾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 정책을 모두 유지한 채 실시되는 제도가 아니다. 기본소득의 근본정신은 선별적 복지, 즉 자격을 확인한 뒤 복지 혜택을 주는 제도가 비효율적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 실업자, 특정 조건에 놓인 노인, 소득이 낮은 농민…, 이 사람들을 일일이 분류해 그에 맞는 복지 혜택을 주는 데에 행정비용이 너무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복지는 보편적으로 하고 과세는 누진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부자를 골라내는 것이 가난한 사람을 골라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
예를 들어 월 소득 100만 원 이하인 사람을 쉽게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나? 뒤져보면 10억 원짜리 집이 있을 수 있는데? 직장이 없다고 무조건 ‘가난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나? 알고 보니 아버지가 이건희인데? 이래서 가난한 사람은 선별이 어렵다.
반면 부자는 구별하기 쉽다. 월 급여 1000만 원 이상이면 그냥 부자로 보고 소득세율 높게 매기면 된다. 보유한 집 가격이 10억 원 이상이면 그냥 부자로 보고 재산세 많이 부과하면 된다. 복지는 보편적으로, 과세는 누진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 보편적 복지의 결정판이다. 즉 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하면 다른 복잡한 복지제도는 대부분 폐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만으로 모든 복지의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가 월 300만 원이라는 거금을 기본소득 금액으로 산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위스는 북유럽 국가들과 함께 대표적인 복지 강국이다. 실업급여만 해도 스위스는 실업 1년차에 적용받는 급여 보전율이 80.7%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위(한국은 최하위권)에 해당한다.
이처럼 복지 혜택이 다양하고 풍족한 국가에서 기본소득 금액을 낮게 설정하면 제도의 효과 자체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본소득의 규모가 다른 모든 복지 혜택을 덮을 만큼 큰 금액이어야 다른 복지제도를 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가 설정한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은 결국 스위스의 기존 복지제도가 워낙 잘 돼 있다는 그 나라 현실의 반증이다.
자, 거꾸로 한국을 생각해보자. 아직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논의조차 시작되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진보진영 곳곳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제시되는 기본소득 금액이 얼마일 것 같은가?
고작 월 30만 원이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강남훈 이사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실적으로 한국의 복지 수준을 감안하면 시도해 볼 금액은 월 30만원”이라고 주장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은 아무리 선별복지 혜택을 받아도 그게 월 30만 원을 넘지 못한다. 복지 사각지대도 많지만, 복지 혜택의 사이즈 자체가 워낙 작다. 스위스는 월 300만 원이어야 겨우 효과가 발생하는데, 한국은 월 30만 원이라도 효과가 발생하는 서글픈 현실, 이건 그냥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이다.
스위스가 포퓰리즘을 거부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 나라 국민들이 거부한 건 포퓰리즘이 아니라 월 300만 원이라는 거금의 비현실성이다. 그리고 그 비현실성은 복지국가 스위스의 탄탄한 복지정책 때문에 생긴 것이다.
“스위스가 복지 포퓰리즘을 거부했다”는 무식한 소리 하기 전에, 월 30만 원으로 다 커버되는 한국의 복지 현실부터 돌아봐야 한다. 기본소득을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논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원래 기본소득은 복지가 잘 돼 있는 나라보다 대한민국처럼 복지가 ‘후진’ 나라에서 훨씬 효과가 큰 제도다. 기본소득이 그렇게 싫으면 다른 복지부터 좀 챙기는 시늉이라도 하라! 스위스처럼 복지 하기는 싫고, 스위스가 기본소득을 부결시킨 건 기쁘고…, 앞뒤가 이렇게 안 맞아서야 어디 논쟁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