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하고 이기적인

메리 더글러스의 '위험과 문화' 中 서문(옮겨온 글)

대지의 마음 2017. 7. 16. 14:59


*'위험과 문화'는 이미 절판이 되어서 구할 수 없다. 구한다고 하더라도 번역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여기저기 검색을 하다 아래의 글을 만나게 되었다. 서문 부분만이라도 참고하자. 원 글의 번역자에게 감사드린다.






위험과 문화: 기술적, 환경적 위협을 선택한다는 것에 대하여
Mary Douglas & Aaron Wildavsk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3. 
번역 전현우. 

서문: 우리는 자신이 직면한 위험을 알아볼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위험을 알아볼 수 있는가? 지금, 아니면 미래에라도? 물론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마치 위험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위협(danger)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위협은 알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위협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이 직면하는 총체적 위험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계산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위험을 무시할 지를 대체 어떻게 결정하는가? 그들은 어떤 위협에는 맞선다는 판단을, 또 다른 위험에는 다음 순위로 미뤄놓는다는 판단을 대체 무엇에 의해 하는가? 

최근, 위험에 대해 널리 퍼져있는 생각에는 세 가지 기묘한 점이 있다. 먼저, 위험이 서방세계에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있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려 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위험을 염려한다. 전쟁, 공해, 고용, 인플레이션 등. 세 번째, 지식과 행동이 서로 아귀가 들어맞질 않고 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프로그램은, 그것이 무엇이든 최악의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데 명백히 실패하고는 한다. 결국, 무엇이 위험한지, 어떻게 위험한지, 그리고 이에 대응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있는 것이다.

위협이 정말로 늘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실제 위협에 비해 더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리고 환경이 기술로 인한 위험에 예전보다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핵 쓰레기와 발암 위험이 있는 화학 물질은 허구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물론 우리는 기술로 인한 편익도 누리고 있다. 기대 수명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안전]사고율, 그리고 영아 사망률은 계속해서 감소 중이다. 이런 위협에 대해서는 진보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런 위험과 편익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서로 다른 집단들은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상황에 대해 각기 대단히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위험에 대한 공포(이는 위험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용기와 한 쌍이기도 하다)가 어떤 수준인지는 지식, 그리고 사람들의 유형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공공 정책의 층위에서, 주요 위협은 다음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외교적 문제. 외국 세력의 공격 또는 침략의 위험. 전쟁. 영향력, 특권, 권력의 상실. 
2. 범죄. 내적 붕괴. 법률과 명령의 불이행. 화이트 칼라 범죄 대 폭력.
3. 공해. 기술의 오용. 환경에 대한 공포.
4. 경제적 파산. 번영의 상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들 네 종류의 위험을 모두 동등한 수준으로 걱정하고 있을까? 여론조사 기업 해리스 사가 수행한 조사를 살펴보자. 이는 일반 대중, 기업 중역, 연방 감독관과 같은 사람들이 위험에 대해 대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를 조망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었다. 해리스 사가 제공한 결과에 따르면, 일반 대중 가운데 기업 중역과 비교했을 때 두 배나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지난 20년(옮긴이: 즉 60년대에 비해)동안 사회가 더 위험해졌다고 생각한다. 한편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61퍼센트의 대중 및 중역들이 과거보다 더 불안정하고 따라서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독관 가운데서는 겨우 34퍼센트만이 이에 동의한다. 반면 화학 물질의 위협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과 감독관에 비해 세 배나 많은 기업 중역들이 20년 전에 비해 덜 위험한 수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절대값으로는 38퍼센트 대 13퍼센트(대중, 감독관 각각)이다. 감독관의 답과 기업 중역들의 답을 비교해 보면, 기업 중역 가운데 41퍼센트는 이 나라[미국]가 이전보다 경제와 에너지 측면에서 더 큰 위험에 빠져있다고 보는 반면 (1980년 4월 시점에 수합한 답이다) 연방 감독관들은 단 10퍼센트만이 동일한 답을 했을 뿐이다.

전문 부분에서 벌어지는 공적 논쟁으로 가 보자. 여기서, 논쟁 참여자들(정당, 이익단체, 정부 관료)들이 동등한 수준의 위협을 서로 다른 대상에 획일적으로 귀속시키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예를 들어, 외국의 공격을 가장 크게 염려하는 사람들은 국내 환경 오염은 덜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또, 거리에서 일어나는 폭력 범죄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득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그만큼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이 두 경향은 서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지적인 사람의 표지는 아마도 그가 배운 것이 많으며, 또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더 잘 자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과학의 발전 덕분에, 우리 인간은 자연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식의 새로운 영역이 열리면서, 과학은 사람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효과도 함께 일으키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된 위험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물론 어떠한 것도 지식의 총체를 짧게 요약해서 보여줄 수는 없다(그것은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에 대해, 뭔가 정신나간 답을 하는 꼴이니 말이다). 수천 가지의 화학 물질 가운데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수백 가지가 넘는다는 것은 아마도 전쟁의 원인은 대단히 다양하다는 사실이나 가난의 고통, 또는 종교 및 인종적 분쟁의 흉포함 같은 사실과 쉽게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모종의 범위에 속하는(이것은 누군가의 걱정거리일 수도 있다) 대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위험 경보에 해당할 수 있다. 실제로, 걱정거리를 제한하는 것이 그것을 늘리는 것 보다 정신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다. 누구도 모든 것에 주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위협 가운데 어떤 것을 우선 순위에 둘 것인지 판단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위험한 대상을 헤아리기만 한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에 내버려두는 행동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위협이 더 위협적인지 알기 위해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는 (바로 이것이 위험 평가가 요구하는 것이다) 먼저 평가 규준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위협의 순위를 매기는 데에는 어떠한 기계적인 방법도 없다. 과학 철학자 제롬 R 라베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위험 문제를 분류하고, 평가하고, 또 최종적으로 모종의 기술적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는 희망은, 실질적으로 인간의 모든 경험과 가치를 수학적 또는 정치적 조작을 위해 양적 평가를 내리는 저울 위에 올려놓는 프로그램만큼이나 야심찬 것이라고 하겠다.

누구도 위험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위협이 정말로 대부분의 경우 그들에게 해로울지에 대해서도 역시 어떠한 보장도 있을 수 없다. 게다가, 하나의 위험을 극복했다고 그것이 꼭 좋은 의미인 것도 아니다. 위험을 회피하는 데 성공할 경우, 사람들은 다른 위험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경우, 또 다른 위협이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라베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개념상, 위험이란 곧 통제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 때문에 벌어질 위해(hazard)가 충분히 예방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알 수 없다. 심지어 위해가 이미 발생한 상태라고 해도,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행위를 더 시행으로 옮겨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런 행위가 이른바 “납득할만한” 행동의 범위 안에 속하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 법이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 시대에 대한 기록이 좀 더 완전한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기록을 보는 역사가들은 우리 세대가 좀 더 안전한 다른 노선을 택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 분명 서로 다르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여하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노선을 따라 갈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행동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종류의 위험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에게 수용될만할지에 대한 질문(이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을 확대할 경우, 오늘날의 지식으로 인해 나타나는 불확실성은 증폭되게 마련이다. 바루흐 피쉬호프(Baruch Fischhoff), 사라 리히텐슈타인(Sarah Lichtenstein), 폴 슬로빅(Paul Slovis)에 의해 수행된, 수용될만한 위험에 대한 종합적 연구에 따르면, 위험 수용성은 언제나 정치적 문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선택은 그에 앞서 고려된 대안, 가치, 믿음에 의존하여 이뤄진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 “수용될만한 위험”이라고 할만한, 단일한 만능의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용가능한 위험을 다루기 위해서는, 가치와 불확실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위험 대안 사이에서 선택하는 과정은 결코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 “객관적인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으며, 또한 그런 방법을 추구하는 자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치 의존적 가정을 반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각각의 접근 방식은 결정적인 답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들 접근 방식은 각각의 이해 관계를 드러내는 한편, 각각의 해결책을 제시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접근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누가 주도권을 쥘 것인지 그리고 어떤 문제에 대해 그렇게 할 것인지에 대해 명료한 메시지를 보내는 정치적 결정이다.

위험에 대해, 올바르고 단일한 접근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이게 만들만한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널리 퍼져있는 위험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면 이는 곧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 위험에 어떻게 순위를 매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사람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위험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그리고 일반인들처럼 과학자들 역시 위험에 대해 서로 동의하고 있지 못하다면, 대체 어떻게 특정 위험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계산이 힘들 정도의 가능성에 직면했을 때, 대체 어떻게 해악(harm)의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을까?

위험이란 미래에 대한 지식이라는 변항,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가능성에 대한 승낙이라는 변항으로 이뤄진 곱셈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런 취급은 문제를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지식이 확실하며 승낙이 완전하다면, 그리고 목적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으며 모든 대안적 방법이(그 발생 가능성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면, 최적의 해법을 산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기동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기술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해법은 계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 경우의 수, 즉 지식은 확실하지만 승낙은 논쟁 덕분에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문제와 해법이 다르다. 결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문제이며, 해법은 추가적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더욱 논의에 힘쓰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의 수에선 승낙은 완전하게 이뤄져 있으나 불완전한 지식이 그것을 가로막는 상황이다. 이는 불충분한 정보를 문제로 만들고, 따라서 그에 대한 해법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넬킨과 폴락은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위험 관련 논쟁을 정부가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관찰한 바 있다. 

만일 기술적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목적은 “과학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이 되게 마련이다. 이는 대중 정치인들이 과학적 조언을 듣고 논쟁을 평결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일 논쟁이 상당히 생소한 용어로 이뤄진다면, 대중참여를 더 유도하거나 자문단을 구성하도록 하는 체계가 발달할 것이다. 또한 대중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에 대해 불충분한 정보만이 알려져 있을 경우, 아마도 사람들은 기술에 반대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과제는 일종의 “교육”이 될 것이다. 

마지막 경우의 수, 다시 말해 지식은 불확실하고 승낙 역시 이뤄지지 않은 상황은 바로 어떠한 학식 있는 사람이라도 위험을 확실히 평가할 수 없는, 오늘날의 딜레마 상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새로운 지식에 대한 필요를 감소시킬 수 있으며, 또 동시에 소수의 비판적 주제에 사람들이 주목하도록 만드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요구를 줄이는 한편 동시에 소수의 핵심 주제에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을까? 사회적 합의만이 어떤 문제를 쟁점으로 비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위험 지각은 사회적 과정이다. 모든 사회는 확신과 공포의 조합에 의존하고 있다. 공포에 대해 배운다는 것은 곧 확신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인 셈이다. 어떤 공포는 물리적이고, 또 어떤 것은 사회적이다. 아마도, 정의가 실현될 것이고 또 사회적인 안전망이 가동될 것이라고 믿는 시민에게는 물리적 공포가 큰 위협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아마도 [모종의 영예로운] 죽음을 어떠한 영예도 없이 죽는 것 보다 꺼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수용할만한 위험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이는 곧 잘못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행동 지도 원리들이 가장 공포스러운 위협이 무엇인지, 어떤 위험이 주의를 기울여 살펴야 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그런 위험을 살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끼친다.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의 레레(Lele) 족은 온갖 처치곤란한 열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열병, 위장관염(Gastroenteritis), 결핵, 나병, 종기, 불임, 폐렴 등등. 이 질병의 세계 속에서, 레레 족은 무엇보다도 우선 벼락을 맞는 상황이나 불임과 같은 상황에, 그리고 기관지염이라는 한 가지 질병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이들은 이런 문제들은 대체로 환자(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은 무고한 것처럼 보이지만)의 비도덕성이 유발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 환자와 연관된 부족 지도자나 마을 원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서라면, 그 나라의 문화는 같은 위해를 매우 다른 선택을 통해 관리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때때로, 마을 원로에게 책임을 물리기보다는 자책을 통해 스스로 책임을 지게 만드는 문화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재난은 환자의 과실로 인한 것이다. 원로를 비난하든 환자를 비난하든, 사회가 어떤 유형인지에 따라 책임의 유형을 결정하고 동시에 특정 위협에 중요성을 부과하는 방법이 정해질 것이다. 생물학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이 책에서 발전시켜 나갈 위험 지각에 대한 문화 이론은 사회적 환경, 선택 원리, 그리고 하나의 체계로서 이 모든 것을 지각하는 하나의 주체를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사회 주변을 둘러싼 진짜 위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위협은 언제나 실재하며, 게다가 아주 많다. 14세기 유럽에서 물이 사람들의 건강에 지속적인 위해를 끼쳤다는 사실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 지각의 문화 이론은, 이 사실은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을 기소할만하게 만든 이유일 경우에만 대중의 선입관이 된다고 지적할 수 있다.

문화적 접근은 어떤 공동체가 자연적인 해악을 도덕적 결점과 연루시키는 방법에 대해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논변에 따르면, 해악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회적 비판의 힘과 방향성에 의해 정해진다. 사망 및 질병 통계는 이런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된다. 왜 우리는 화재보다 석면의 독성을 더 두려워하는가? 석면 건축 자재는 인명과 재산을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한편 석면의 독성은 일종의 산업 공해로, 암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숫자를 통해 나타낼 수 있다. 이 숫자가 화재로 인한 인명 손실보다 훨씬 더 많다는 반 산업적 비판이 석면의 독성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반면, 휴가 기간 동안의 일광욕으로 인한 피부암 발생 통계를 산업 비판을 위해 동원할 마땅한 방법이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런 비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위험 지각과 도덕적 비난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고 해서, 위협 사이의 선택이 곧 정치적 분석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일 것이다. 물론 동시에, 정치를 적절한 방식으로 다뤄야 할 필요도 있다. 만일 위험 지각에 대한 문화 이론이 (미국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험 패턴과 힘의 분배를 연관시켜서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이론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이끄는 작업 가설은, 어떤 형태의 사회든 그것은 자연 환경에 대해 그 자신의 선택된 관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어떤 위협에 얼마만큼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한 삶의 방식을 이끄는 여러 가치를 지키려면, 일반적으로 자연 재해에 대한 책임을 지닌 주체를 만드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따라서, 문화적 모형에 기반을 둔 위험 지각 연구는 사회적 삶의 어떤 점이 다르다면 위협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인지에 대해 밝히려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특정한 위협이 주의를 끌만한 것으로 선택되는지에 대해 보여주기 위한 시도다. 우리는 가난의 위험 또는 전쟁의 위험이 어떻게 지각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자 했으나, 사전을 쓰기 위해서 그러지는 않았다. 우리의 책은, 왜 공해가 우리 시대의 특별한 관심사로 선발되었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떤 위험을 걱정거리로 선택할 것인지는 사회의 형태에 의존한다고 답할 것이다. 어떤 위험을 선택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사회적 삶의 형식들은 각자에게 전형적인 위험 포트폴리오를 지닌다. 공통의 가치는 공통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와 무관한 것에 대해서는 공포스러워 하지 않기로 하는 공통의 합의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각과 실재 사이에는 어떠한 간극도 없으며, 또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형태로는 그렇다. 진짜 위협은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언제나 사태가 다른 식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게 마련이다). 미래에 일어날 위협을 피하기 위해 행동하려면, 각각의 사회적 장치들은 어떤 위험은 높게 평가하고, 다른 위험들은 시야 밖에 둘 정도로 낮게 평가해야만 한다. 이런 문화적 쏠림은 사회 조직에 내적인 것이다. 위험 수용 그리고 위험 혐오, 공유된 확신과 공유된 공포는 어떻게 사회적 관계를 최적의 상태로 조직할지에 대한 논의의 일부분이다. 이는 조직한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를 안에 집어넣고 또 무엇인가를 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회는 공해의 위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고 말할 경우, 이는 다른 종류의 사회 조직은 객관적이며 한 쪽으로 쏠려 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다른 종류의 사회는 다른 종류의 위협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위험을 대체 어떻게 선택하는가? 우리는 자신의 사회 제도를 선택할 때 사회 제도와 한 바구니에 들어있는 위험을 선택하게 된다. 개인은 모든 방면을 한번에 살펴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회적 삶을 위해서는 한 쪽으로 쏠리는 여러 경향들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우주를 사회적 쏠림을 통해 정리한다. 이들 쏠림을 분명히 드러낸다면, 우리는 어떤 방침 차이가 조정될 수 있고 또 어떤 방침 차이는 조정될 수 없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위험 논쟁에 참여하는 양 편은, 상대가 선호하는 사회 조직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가 산업 조직 또는 그에 대항하여 로비를 벌이는 “위험 조직이든” 간에, 양 편은 상대의 논변이 자신을 변호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쏠림은 이런 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이 쏠림을 감안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어떤 것이 합리적인 행동에 대한 올바른 기술인지 묻는다면(즉 무엇이 진짜 위험인지 묻는다면), 이 질문에는 무엇이 비합리적인 쏠림이고 또 무엇이 (올바른 기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진짜 이해관계를 잘못 지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지적하는 것을 통해 답변할 수 있다. 반면, 문화적 분석은, 어떤 가치와 믿음의 덩어리가 주어질 경우 이것이 어떻게 사람들이 택하는 다양한 입장과 그들이 행하는 다양한 실천을 유의미하게 만들어 줄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 자신의 사회가 믿을만하고 정합적인 제도를 가지도록 바꾸기 위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흔쾌히 받아들일 믿음과 가치는 대체 무엇일까?

사람들이 특별한 삶의 방식과 함께 나타나는 특정 위협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선택한다는 생각을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다른 종류의 사회 조직 형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위험을 받아들이려는 (그리고 피하려는) 성향을 가진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잇다. 그렇다면, 위험 선택과 위험 지각을 바꾸는 일은 곧 사회 조직을 뜯어 고치는 일에 의존할 것이다.

어떤 위험이 수용 가능한 수준인지에 대한 질문은, 자연과 기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 만으로는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자신을 둘러싼 가능한 위협을 대부분 무시하는 데 동의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오직 선택된 특정 측면에 대해서만 집중하기 위해 상호작용하는지 문제다. 

이제 다른 방식으로 이를 설명해 보도록 하자. 기술을 둘러싼 논쟁에서, 핵심 어구는 바로 위험과 수용가능성이다. 기술로 인한 위협이 얼마나 되는 확률을 지니고 있는지 계산하려면, 그는 물리적으로 “저쪽에 있는”, 다시 말해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개입 때문에 일어나는 위험에 집중해야만 한다.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정하려면, 그는 “여기에 있는”, 다시 말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불확실성에 집중해야만 한다. “저쪽”에서 “여기”로 넘어오려면, 기술의 위협과 그 위험에 대한 사람들의 지각이 연결될 필요가 있다. 한 종류의 접근(기술의 위협은 객관적으로 자명하다)이든, 또 다른 종류의 접근이든(모든 지각은 주관적이다) 양자를 연결시킬 수는 없다. 문화적 접근방법만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세계가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한 경험적 판단을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런 판단을 발전시키려면, 우리는 우리 세대에 일어나는 문화적 변화에 의탁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감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을 살펴보자. 언제나 위험을 경고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들이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숨쉬는 공기, 살아가는 땅, 사용하는 에너지를 빼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5년에서 20년이라는 놀라울 만큼 짧은 기간동안, 물리적 세계에 대한 확신은 의심으로 돌변했다. 안전의 원천이던 과학과 기술은 위험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이토록 격렬한 반응이 있었는가? 환경 규모의 공해 및 개개인이 당하는 오염에 대해 갑작스럽고, 널리 퍼져있으며, 전면적인 관심이 서방세계 일반에서 일어난 이유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또 미국에서 이런 관심이 널리 퍼지게 만든 특별한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대체로 널리 퍼져있는 입장임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분파주의적 견해가 있으며, 이 견해는 사회적 변화가 보여주는 복잡한 역사적 패턴 덕분에 가치 있는 것으로 수용된다고 생각한다. 문제의 견해는 세 가지 면에서 적극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선, 평등, 가슴과 마음의 순수성. 이 견해가 품고 있는 이상에 대한 위협은 세속적 성격 그리고 음험한 모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속적 말로 풀어보자면, 세속적 성격은 거대 조직, 거대 자금, 시장의 교환 가치 속에서 드러난다. 이들 모두는 평등을 거부하며 선과 순수성을 공격한다. 모략은 비밀 공격을 꾸미며, 본질적으로 선한 이 세계에 악을 주입하는 파당에 의해 나타난다. 사악한 세계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은 사탄이나 마술, 또는 그 현대적 등가물,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을 좀먹는 은밀한 기술적 오염이다. 우리는 이런 이상과 위협이 자발적 조직이 지닌 문제점에 대한 응답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런 자발적 조직은 조직 내 논쟁을 통해 매일같이 새로 주조되는 화폐와도 같다. 강제력이나 공공연한 리더쉽 없이 구성원을 한데 모으려면 이런 방법을 택해야 한다. 이러한 조직 내에서 가장 쉽게 제시되는 처방은, 악과 타협하기 거부하는 방법 그리고 악의 뿌리를 뽑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에는 불관용, 그리고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향하는 경향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자발적 원리에 의존하는 이런 조직은 동시에 부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인공물 때문에 부패되지 않은 야생의 자연은(이런 자연은 사회적 구분이 없는 사회와 동격이다) 그들이 신성의 표지이자 비 세속성의 상징으로 선호하는 것이다. 위험 혐오로 향해 있는 최근의 경향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문화적 설명을 발전시키기에 앞서, 우리는 몇몇 경쟁 이론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위험에 대해 새롭게 일어나는 열광적 관심에 대해, 미국은 지난날보다 더 부유해졌으며 미국인들은 이제 좀 더 위험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인기가 있다. 래스터 래이브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미국 산업 경제의 생산물에 질려버렸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환경이 더 쾌적해지는 한편 그들이 구매하는 물건과 일터가 좀 덜 위험해지는 동시에 또 실질 소득의 증가와 동시에 건강 일반이 증진되는 것도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역설처럼 보이는 문제[“미국인들은 이전 어느 시점보다 지금 안전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이전 어느 시점보다 건강과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위험이 더 낮아지기를 바라는 욕구가 급속도로 증대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쉽게 풀린다. 

이 논변을 계속 밀고 나가면, 결국 이 사태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잃을 수도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나 텔레비전 같은 물질적 욕구를 채우고 나면, 안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의 논지 전개는 분명 그럴듯하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하고 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안전은 다른 소비 상품처럼, 일반적인 물질적 진보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부유할수록 위험을 더 싫어한다는 주장이 정말 참일까? 만일 그렇다면, 왜 이들은 경제적 재앙, 범죄, 전쟁과 같은 위험은 혐오하지 않을까? 왜 이들은 다른 종류의 위험보다는 기술적 위험을 택한 것일까?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보자. 왜 어떤 삶의 방식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그 신봉자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말인가? 성공은 대체로 동일한 것에 대한 확신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안전이라는 가치가 떠오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풍요가 그것을 만들어낸 문화에 대한 불신을 불러오고 있다는 명제가 문제다. 대체 어디서 이런 생각이 나타난 것인가? 

위험에 대한 연구는 위험에 대중이 기울이는 관심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사회학적 이론을 낳고 있다. 일반 대중 안에 있는 수입 변화, 교육 수준, 농촌 또는 도시 거주 여부와 같은 변수들이 공적 판단을 바꿀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면밀한 조사가 이뤄진 바 있다. 이들 조사를 통해, 공적 관심사는 평균 이상의 수입과 교육수준을 지닌 전문직 또는 관리직 종사자들에 의해 주도된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이 가운데, 더 강조되었던 것은 일반 대중에 비해 이들이 더 교육받은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어디서나 지도층에 관한 사실이기도 하다). 이런 관찰은 교육은 그 자체로 사회적 자각을 낳는다는 식의 설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위험한 일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사회 편에서 서서 경고를 보내는 감시자들이 가장 잘 교육받은 계층에서 온다는 주장은 물론 설득력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왜 다른 시기가 아닌 지난 20년간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지, 그리고 왜 기술에 대한 의심이라는 특정 방향으로 관심이 쏠려 있는지를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없다. 위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교육으로 설명하려면,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위험에 무관심하다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설명해 줄 모종의 문지방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이론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단지 생존만을 위해 투쟁해야 할 때 개인은 대단히 좁은 시야만을 지닐 뿐이다. 그의 정치적 요구는 물질적인 것에 국한된다. 음식이나 집 같은 것들뿐이다. 산업적 부 덕분에 경제적 행복이 보장되고 나면, 사람들은 자유나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경제가 더 발전된 단계로 접어들면, 사회적 양심이라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단계에서, 이타주의적 관심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관심사에 대한 로비 활동이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이것도 위험이 그 관심사로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왜 환경에 대한 사회적 양심이 선택된 것인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육이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원조 활동은 왜 그렇지 못한가?

교육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안전이나 생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걱정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아마도 로널드 잉글하트가 집단 귀속 의식과 자아 실현이라고 부른 비물질적 목표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더 많은 수입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민주화와 같은, 삶의 질 향상이 이들의 목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강제력을 넘어서는 개인적 통제의 감각을 원하게 된다. 이런 욕구는 그들의 요구가 “협상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경향이 있을 정도로 대단히 중대한 것이다. 따라서 잉글하트는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억압에 대한 공적 감수성이나 국제적 비교를 통해 동료 인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분석에 활용한 바 있다. 이런 생각은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하다. 이는, 공공의 복지에 관심을 가장 덜 기울이는 사회 계급은 오직 그들의 번영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보자고 제안한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물질적 금전적 필요가 해결될 만큼 운이 좋다면 공적 이해에 대해 발언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집단이 강조하는 공적 이해는 곧 번영을 널리 퍼뜨리는 과제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런 이론과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역사도 그렇다. 극단적으로 풍요로웠던 문명이지만, 그 엘리트들은 공적 정신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곳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매슬로우는 공적 이타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가 산업 발전이 물질적으로 성공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경험에 비춰봤을 때 이는 성립하기 어렵다. 산업 사회가 절정에 도달해서야 이타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 산업 문화 역시 자신의 공적 이해를 지키는 감시자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들은 상당히 가난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에 더해, 서방의 산업화된 사회가 지금의 이타주의적 단계에 접어들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는 못했던 지난 100년(사람들은 바로 이 시기가 잘 설명되기를 바라고 있다)에 어떤 규정을 내리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는 대체 무엇이며,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기는 어려운 안전은 또 무엇인가? 우리의 논변에 따르면, 발전된 기술은 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이 덜 안전하다는(또는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증거 집단이란 없다. 반대로, 역의 방향으로 우리 삶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불확실한 증거들은 있다. 예를 들어 수명이 길어지고 있지 짧아지지는 않는다던가, 건강이 나아지고 있지 나빠지는 않는다던가 말이다.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봐야만 한다.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여러 위협 가운데, 왜 특정 위험이 선택되는가? 이 질문은 분파주의의 성장에 대해 좀 더 설득력 있는 답을 줄 것이다. 

이 책의 구조는 우리가 묻게 될 질문을 반영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자연에 대한 위험을 사용하는가? 다른 것을 묻는다고 해 보자. “대체 무엇이 현대 기술이 자연에 저지르는 일을 지금처럼 깊은 관심의 대상으로 만드는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기술의 사용이 환경에 어떤 충격을 줬는지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평가하는 데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노선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과 환경적 쇠락을 연결시키는 논변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다시 말해 위험이 숨어있게 되며 비 자발적으로 마주하게 되고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기술과 연결시키는 논변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이런 판단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 이런 논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지 반응은, 우리 현대인은 경험적∙증거중심적∙과학적 에토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위험이 사회적으로 선택된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2장에서 우리는 이른바 “발전된” 관점을 “원시”인들의 관점과 비교할 것이다. 독자들은 어떤 위협을 공적 관심사로 선택하는 방법에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모두가 과학자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3장은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어떠한 합의도 없다는 사실을 보일 것이다. 과학자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위험에 대해 의견이 대립해 있기 때문이다. 4장에서는 위험을 사정 평가하는 어떠한 절차도 이에 도움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보인다. 이는 사정평가를 하는 어떠한 방식이든, 그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가정에 의해 한 쪽으로 쏠려 있기 때문이다. 위협 선택이 물리적 증거에 대한 직접적인 사정평가를 통해 이뤄지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을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위험을 사회가 선택하는 사례를 보일 것이다. 5장부터 7장까지는 공유하는 가치들의 집합이자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기관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각 문화들은 특정 위험은 강조하고 다른 위험은 경시하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보인다. 이 방식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위험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아민 파나 후터 파 사람들처럼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낯선 모습을 지닌 동시대 사람들은 어떤 위험을 선택하는지 그 사례를 살펴볼 생각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사람들과 이들의 문화는 일종의 널리 공표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이미 잘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서 있는 입장의 핵심에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만일 위험과 문화가 우리가 주장한 방식대로 연관되어 있다면, 이들의 관계는 지금 이 곳의 현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먼 옛날 우리와는 아주 달랐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당혹스러운 상황(삶에 영향을 끼치는 위험에 대한 경고는 늘어나는데, 동시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건강은 나아지고 있다)에 대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하려는 명시적인 목표를 지닌 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이론을 지금의 미국 상황에 적용할 것이다. 우리는 위협에 대한 문화적 선택이 지닌 정책적 함축을 검토하며 책을 마칠 것이다. 물론, 이런 결론은 우리가 비과학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도, 또 우리가 위험에 탄력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