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치는 펭귄

'진보적 글쓰기'(김갑수, 초록비책공방)에서...

대지의 마음 2017. 7. 28. 08:45


'진보적 글쓰기'(김갑수 지음, 초록비책공방)


한 번의 독서로는 부족하다. 좋은 글이 갖춰야 할 조건들을 수긍하더라도 손 끝으로 펼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일테니 읽고 생각하는 고된 과정이 필요하다. 몇 차례 더 읽을 것이다. 다만 군데군데 자연스러움을 깨는 넘침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아쉽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책에서 옮겨온  몇 개의 문장]



-말이건 글이건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다. 좋은 말이란 글 쓰듯이 하는 말이고, 좋은 글이란 말하듯이 쓰는 글이다.

 

-나는 좋은 글의 요건 세 가지로 주제의 명료성표현의 정확성생각의 깊이를 든다. 여기에다 논증문의 경우 논증의 적절성논리적 구성과 전개 정도를 추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요건들을 충족시키기에 앞서 이보다 단연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글이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첫째 요소로 순수성을 꼽는다. 순수한 마음의 표현은 독자를 감동시킬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진지성이다. 진지한 자세가 반영된 글은 신뢰성을 높인다. 진지함은 성실성과도 직결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일차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진지하게 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재미있는 글은 누구나 좋아한다. 여기서 재미있다는 말은 의미하는 바가 다양하다. 또한 사람에 따라 재미를 느끼는 양상도 다르다. 이럴 때에는 정상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이 느끼는 재미를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것을 참신성이라고 본다. 참신한 글은 재미를 준다. 반대로 진부한 글은 독자를 무료하게 만든다.

 

-당신이 내심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쓰라는 뜻이다. 글을 쓸 때 남의 눈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쓰려고 시도한다.

 

-상투적인 비유는 언어의 참신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릴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사람을 우스꽝스럽게까지 만든다. 특히 한국의 저널리즘은 비유를 구사해야 멋진 문장이 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글쓰기에 가장 해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하오 9시 뉴스를 든다. 한국의 뉴스 문장은 낡아빠진 비유 문장들로 점철되어 있다.

-일단 비유를 삼갈 것을 권한다. 비유가 가지는 세속성과 장식성과 유형성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글은 한 가지 주제로만 일관됨으로써 문력文力과 통일미를 방출한다. 그렇다면 왜 논점일탈이 나오는 것일까? 사전 준비 없이 쓰기 때문이다.

-당신은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어디선가 보고 간직해 놓았던 그럴듯한 말이 떠올랐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자기 글에 무리하게 접목시켜 반영하려다 보면 논점일탈이 발생한다. 또한 당신은 마치 섬광처럼 기발한 영감inspiration이 떠오를 때도 있을 것이다. 아쉽지만 이런 영감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것은 남들에게도 떠오르는, 기발하지 않은 평범한 착상인 수가 많기 때문이다. 자기 영감에의 확신은 논점일탈로 귀결된다.

 

-표현이 정확한 글이란 일단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고 바른 문장이 구사된 글을 말한다.

 

-적절한 논증의 글이 되려면 전제와 결론, 근거와 주장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생각의 깊이는 독서와 사색의 부단한 병행으로 얻어진다. 독서만 많이 하고 사색이 없으면 경박한 사람이 되고, 사색만 많이 하고 독서가 없으면 위험한 사람이 된다.”는 공자의 말은 날카로운 지적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첫 문장은 무조건 곧장 시작해야 한다.

 

-좋은 글은 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과 함께, 뒤에도 아무것이 없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시작과 끝이 함께 있다.

    

-오래 전에 나는 논술의 수사학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여기서 수사학은 레토릭rhetoric을 의미한다. 레토릭이란 글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뜻하지만 아무래도 기교적 측면이 강한 용어이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글에 대해 공감하게 만드는 온갖 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연주를 잘하는 음악가가 있다고 치자. 나를 공감케 하는 그 연주로만 보면, 그는 비범한 정신력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직접 만나 보면 실망하게 될 때가 있다. 음악보다는 덜 하겠지만 문학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아무튼 이럴 경우 음악이건 문학이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한낱 기량일 따름이다. 반면에 정신은 비범한데 작품은 보잘 것 없는 경우도 비슷하게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그것은 불운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데 처음 유의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가급적이면 기량을 강조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이 요구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신에 비해 기량이 부족하다. 아니 글쓰기에 필수적인 기량 공부가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우선 글을 만드는 데 화급히 필요한 것들에 역점을 두어 논의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책을 내면서도 개운하지가 않다. 나는 하루 약 10시간 정도를 들여서 평균 35매씩 소설쓰기를 강행한 적이 있다. 하루 35매면 단순 계산으로 잡아 40일에 1200장짜리 장편소설이 하나 만들어진다. 그런데 집필 개시 이전에 구상과 자료 읽기에 들어가는 시간이 있다. 대체로 이것에는 최소 한 달 이상이 필요하다. 보통 소설 하나 당 책 20~30, 그리고 이보다 많은 논문과 기록물 등의 자료를 먼저 읽어야 한다. 구상은 자료 읽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자료 읽기에 앞서 미리 큰 구상을 한다. 그러고는 큰 구상에 따라 자료를 선정, 취합한다. 어떤 자료를 읽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취합된 자료를 읽으며 내 구상에 부합하거나 유다른 의미가 있거나 독자에게 매혹적인 흥미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밑줄·별표 등의 표시를 하고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목차 형식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기왕 표시된 자료만을 다시 읽는다. 이 과정에서 처음의 큰 구상은 상당 부분 달라진다. 구상과 자료 읽기를 모두 마치면, 나는 아무것도 읽거나 보지 않으며 철저히 빈둥거리기만 한다. 이것은 집필에 앞서 에너지를 비축하기도 할 뿐더러, 나를 한없이 무료하게 만들어서 결국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충동이 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세부적인 인물과 지엽적인 사건들의 연상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조차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나를 무자비하게 공동화空洞化시키자.’ 이것이 이 시간 나의 슬로건이다. 그렇긴 하지만 간헐적으로 꼬리를 물며 연상되는 작은 생각들을 모두 물리칠 수는 없다. 결국 작은 구상은 이때 완성되는 셈이다. 구상을 치밀하게 해 놓으면 집필에 힘이 덜 드는 대신 분방한 상상력에 제한을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구상에는 과유불급이 요구된다. 집필이 본격 개시되고 나서 약 40~60일이면 1200장 장편이 하나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퇴고에 최소 열흘이 소요된다. 물론 집필의 과정에도 매일 퇴고가 있다. 퇴고는 1차로 모니터에서 한 후, 2차로 인쇄하여 다시 읽으면서 하고, 3차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한다. 이때 잘 읽히지 않는 문장이 있으면 거의 고친다. 글을 쓴 사람에게도 잘 읽히지 않는 문장이 남에게 잘 읽힐 턱이 없다. 최종 퇴고는 집필 완료 후 두 차례 정도 더 읽으며 한다. 이렇게 해서 장편소설 하나가 만들어진다. 결국 장편소설 하나를 완성한다는 것은 반년 정도의 기간 내 삶의 전부를 투여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이 시간에는 아주 여러 가지 것들이 무시로 나에게 찾아들어 나와 함께 한다. 그들의 목록에는 인고·저돌·치밀·긴장·합리·피로·실망·타협·회의·자위·자조·자신·성찰 등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작품이 된다는 보장이 없는 데서 오는 막막함이다. 이런 무서운 것을 물리치려면, 비록 타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나에 대한 관용밖에는 없다. 물론 이 기간에 건강 악화를 경고하는 신체적 징후들도 불청객처럼 찾아든다.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어느새 나는 내가 낸 책이 몇 권인지 정확히 헤아리지 못할 만큼의 글을 썼다. 아마 소설과 비소설이 반반쯤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책은 비소설이다. 공저 두 권을 포함하여 열댓 권은 넘을 것 같은데 굳이 세어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뭘까? 내가 쓴 열댓 권의 책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것이 이렇다. 아무리 써대도 만족이 없고 욕망이 식지 않는다. 나이와 함께 다른 욕망은 감퇴해 버렸는데 글쓰기만은 아직 예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