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위하여

<경향>의 민노당 비판은 진보판 색깔론_유창선

대지의 마음 2010. 10. 12. 09:32

다들 북한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나. 당신들 이상한 것 아닌가.

<
조선일보>가 한 말이 아니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신문>이 민주노동당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이윽고 민주노동당에게는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돌팔매질이 이어진다.

 

이 글은 진보언론이 만들어낸 이 해괴한 상황에 대한 관찰보고서이다.

 

먼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몇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자.

 

첫째,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한 바 없다.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경향신문>이 문제삼고 있는 지난 달 29일 대변인 성명에서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부분은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부연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마타도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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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0월1일자 사설

 

 

둘째,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절독을 선언한 것은 <경향>이 북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권력세습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향>은 이와 관련된 기사의 제목을 민노당 일각 3대세습 비판경향신문 절독 선언이라고 달아버렸다. 엄청난 오해를 낳을 사실왜곡의 제목이었다. 역시 <조선일보>가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흔히 쓰던 방식이었다.

 

셋째. 필자에 관한 얘기이다.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 입장표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해도 북한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북한은 내부결속을 위해 다시 대화의 창을 닫아버릴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이런 입장표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을 옹호하려는 당신도 종북주의아니냐는 비판을 <경향>으로부터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참담함과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다. 명색이 한 지식인이 진보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현실. 차라리 상대가 <조선일보>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번
<경향>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진보판 색깔론이라고 규정한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정당은 주요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밝힐 책임을 갖고 있다
. 그러나 동시에 전략적 고려 하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권리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 전략적 고려가 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향>은 그런 민주노동당을 강압하고 나섰다. 표현만 달랐지, 다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안그러느냐, 당신들은 권력세습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식의 얘기였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수많은 독자들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상적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주체만 <조선일보><경향신문>으로 바뀐 것이었을 뿐, 행태의 속성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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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국방위원장 후계자 김정은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빚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거국적 비판이 그렇게까지 급선무였다면 차라리 청와대 대변인의 비판성명을 요구하는 것이 빠른 길 아니었을까

 

결국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정당의 분열을 낳았던 소모적인 종북주의 논쟁을 재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인터넷과 트위터 상에서는 이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재연되었고, 논쟁의 구도는 진보정당이 분열될 때의 종북주의 논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당시의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해 진보정당도 다시 통합의 길을 찾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이 시기에, 그래서 두 진보정당이 통합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경향>은 왜 이런 문제를 들쑤셔놓았을까. 나는, 당사자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경향>의 생각이 짧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은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의 앞길에 대해 하나는 생각했지만,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경향>에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당장 비판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서울광장에서 북한의 3대 세습 규탄 궐기대회라도 열리고 거기에 진보정당들까지 손잡고 나서는 광경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 있었던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 안에서의 색깔 덧씌우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경향>의 일련의 보도 이후 민주노동당이 그에 동조했다는 오해를 갖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제라도
<경향신문>이 사실왜곡의 기사제목을 단데 대해서는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압한데 대해서는 (사과는 안하더라도)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갖기를 주문한다. 명색이 진보 내부에서 색깔 덧씌우기가 활보하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후기>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밝혀두자. 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그냥 중도개혁론자 정도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다원적 가치과 사고, 그리고 판단을 보장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구차하게 이런 사족을 달아햐 하는 것이 참 싫다. 그래서 색깔 덧씌우기는 막아야 한다.

 

 

 "<경향신문>과 이대근 씨! 권력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요"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싱가포르의 기적 아닌 기적

 

 

김기협 역사학자

 

 

 

싱가포르의 기적 아닌 기적

19세기 초부터 영국 식민지로 있던 싱가포르가 1959년 자치 정부를 세울 때 리콴유의 국민행동당은 의회 51석 중 43석을 석권했다. 그러나 리콴유는 바로 행정부를 구성할 것을 거부하고 3년 전 구속된 국민행동당 좌파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그들이 석방된 뒤에야 행정부를 구성했다. 좌파는 그 전에도 후에도 리콴유에 대한 최대의 반대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좌파를 적극 포용함으로써 리콴유는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싱가포르는 1963년 말레이연방에 자진 가입했다. 도시 국가 싱가포르의 정치적·경제적 독립 유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리콴유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구의 4분의 3이 중국계인 싱가포르는 결국 연방에 융화되지 못하고 2년 후 쫓겨나듯 독립했다.

약 600㎢의 면적에 독립 당시 200만의 인구를 가진 싱가포르는 보존 자원은커녕 먹는 물조차 수입해야 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에 급성장한 항구 도시로서 사회 질서의 뿌리도 없었다. 핵무기 시대를 맞아 군사적 요충지의 의미도 사라진 마당에 제국주의가 물러간 뒤 그 경제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불확실했다. 탐욕스러운 중국인이 득실거리고 공산주의가 만연한 이 위험한 도시가 말레이연방에게는 반가운 식구가 아니었다.

독립 후 싱가포르의 지상 과제는 생존이었다. 그러나 리콴유의 지도 아래 싱가포르는 생존은커녕 세계를 놀라게 할 번영의 기초를 쌓았다. 이 기적적 성공은 싱가포르의 특이한 조건 가운데 유리한 것은 최대한 살려내고 불리한 것은 극력 억제하는 꾸준한 정책의 성과였다.

중국인은 별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아직도 갖고 있다. 중국 안이든 밖이든 중국인 거주 지역이라면 지저분할 것을 사람들은 예상한다. 그런데 싱가포르는 깨끗하다. 싱가포르를 깨끗이 만든 정책의 예로 '오줌 경보기'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 방뇨하는 짓을 막기 위해 오줌 경보기를 설치, 오줌 냄새가 나면 경비실에서 경보를 받고 뛰어올 때까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국가 경쟁력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이 아름답고 깨끗한 '정원(庭園) 국가'를 만들어온 정책의 꾸준한 기조는 현실주의였다. 오줌 경보기뿐 아니라 태형(笞刑)의 시행 등으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필요한 현실 문제에 한눈팔지 않고 매달려온 결과가 오늘의 번영이라면 배울 점이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98년 5월)

▲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와 아내 콰걱추, 리셴룽 현 총리. 싱가포르의 권력 세습은 용인하면서 왜 북한의 권력 세습은 절대악이 되어야 하는가? ⓒAP

어제 여정민 기자의 "민노-경향, '북한 3대 세습' 놓고 정면충돌" 기사를 보며 싱가포르 생각이 났다.

싱가포르는 자유민주주의로 이름을 날리는 나라가 아니다. 프리덤하우스의 최근 <세계 자유 보고서>에 자유국가 89개국, 반(半)자유국가 58개국, 비자유국가 47개국을 분류하는 가운데 싱가포르는 반자유국가에 속한다. 그러나 싱가포르 주민들의 삶의 질은 아시아 최고, 세계 굴지로 누구나 인정한다. 자유와 삶의 질이 엄격하게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독립 이전인 1959년부터 지금까지 국민행동당이 정권을 독점해 왔다. 리콴유(1923~)는 1990년까지 총리직을 지키다가 고촉통에게 자리를 넘겼지만 '원로 장관(senior minister)'이란 이름으로 내각에 남았고, 부총리를 맡은 그 아들 리셴룽이 실세로 인식되었다. 2004년 리셴룽이 총리가 되자 리콴유는 '스승 장관(minister mentor)'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으로 직함을 바꿨다.

싱가포르에서는 권력이 분명히 세습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싱가포르 사람들을 불쌍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러워한다.

2005년 6월 한 중국 텔레비전과의 회견에서 리콴유는 국가 지도력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틈새를 찾아야 합니다. 작은 나라이면서도 인류에게 유용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작은 구석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꼭대기에 뛰어난 통찰력과 훌륭한 품성을 가진 정책 결정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마음을 여는, 우리가 해 온 것처럼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 내가 해 온 일이란 사실에 있어서 후계자들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찾아낸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할 일은 자기네 후계자들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재능 있고, 헌신적이고, 정직하고 유능한 사람들,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물결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뤄지면 또 하나의 세대에게 임무가 넘어가고, 또 넘어가게 됩니다. 이 물결이 끊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여정민 기자의 어제 기사를 보면 민주노동당은 애초 "북한 후계 구도와 관련해 우리 국민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 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란 논평을 낸 모양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말이다. 북한의 권력 세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싱가포르에 관해서 만큼도 모른다.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싱가포르의 경우를 봐서는 권력 세습 자체가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다. 아마 북한 지도자들이 권력 승계에 관해 하는 말도 위에 인용한 리콴유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북한이 많은 문제를 가진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미국의 봉쇄 정책과 적대 정책을 비롯한 외부 조건에 기인한 것이냐, 아니면 북한 지도 집단의 내재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냐 하는 데는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차이가 있다. 북한의 내부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흔히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조건 나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중에는 북한을 적대시하기 위해 무조건 북한을 비난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민주주의가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민주국가도 큰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비상사태 하에서는 일시적으로라도 민주적 권리를 보류한다. 리콴유의 이야기도 싱가포르가 작은 나라라서 지도력 승계에 비용 절감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력 세습'에는 비용 절감효과가 분명히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주민의 권리와 자유에 얼마간의 제약을 가하더라도 그 제약이 공평하고 공정한 것이라면 그리 큰 불만을 일으키지 않을 것 같다. 똑같은 국부(國富)를 가지고도 분배가 공평·공정하지 못할 때 불만이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

어려운 문제가 크게 일어날 때 '총체적 난국'이란 말을 많이 쓴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총체적 난국을 겪는 사회다. 우리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라면 자기 자격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지만, 그런 어려운 사회에서는 책임이 큰 자리를 아무나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것 같다. 세습이건 뭐건 웬만큼 자격 갖춘 사람이 책임을 맡아주겠다고 나서면 대다수 사람들이 고마워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북한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권력 세습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게 된 이유를 따져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사설은 민주노동당의 입장을 "북한을 무조건 감싸주려는 것"이며 "냉전 시대의 잔재"라고 몰아붙였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북한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어째서 북한을 감싸주는 것인가? 권력 세습이 무슨 천인공노할 절대악이라도 된단 말인가?

권력 세습은 문명 발생 이래 대다수 인류가 역사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겪어 온 일이다. 근대 세계에서 이 제도가 사라진 것은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특정 사회의 조건에 따라서는 그 존속이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북한처럼 각박한 조건에 처해 있는 사회에서 경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계층의 세금을 대폭 깎아준다든지, 개인적 이득을 위해 강바닥을 온통 파헤친다든지 한다면 그 사회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이 사설에 대한 민주노동당 일각의 반발이 있은 뒤 나온 이대근 논설위원의 7일자 논설은 더 심하다. "내정간섭 배제 논리는 국가의 권위는 절대적이어서 그 국가가 시민과 어떤 관계를 맺든, 국가가 시민들을 어떻게 학대하든 외부 세계는 절대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이자 국가 주권을 절대시하는 위험한 사고"라고 했다는데, 국가절대주의자가 아니라면 내정간섭을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제국주의 논리다.

내 잣대로 남의 잘잘못을 재단하는 짓은 제국주의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해 강자가 약자를 침해할 때 상투적으로 써 온 수법이다. 이것이 지나치면 벌거벗은 힘이 날뛰는 폭력의 세계에 빠지기 때문에 최소한의 약자 보호를 위해 세워진 원리의 하나가 '국가주권'이다. 국가주권을 침해하는 내정간섭은 극도로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해서 마음대로 행한다면 나도 남에게 그런 간섭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북한 주민들이 3대 세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북한 주민에 대한 대단한 모독"이라 하고 "그들은 자기 지도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세습을 당연시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니 보편적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는데, 주민들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했는가? 후계자가 주민들의 선택을 받도록 공을 들일 만큼 들이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북한도 남한도 정치 수준에 각기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남한에서 권력이 폭력에 의지하는 미개한 수준을 벗어난 지도 그리 오래지 않고, 군사 독재가 끝난 후의 정치 수준도 남 보기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권력 세습을 하더라도 리콴유 부자처럼만 한다면 부러울 지경이다. 우리 국민이 '선택'한 권력자 중에 그들 부자만한 식견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었던가?

북한에 언론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사회의 자기 성찰 기능이 약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까운 우리가 싫은 소리 듣더라도 열심히 비판해 줄 필요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적절한 비판이어야 한다. 배추 값이 올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왜 양배추 김치먹지 않느냐"는 식의 비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북한의 권력 세습은 현대 상황에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 행태라고 나도 생각하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바란다. 하지만 지금의 북한 사정으로는 적합한 권력 승계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자체가 절대악은 아니다. 이것을 절대악처럼 내거는 것은 북한의 문제를 모두 북한 자체의 책임으로 몰아붙이는 대결주의자들의 프로퍼갠더일 뿐이다. <경향신문>이 이에 동조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