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예 벽보에서 ‘페미니즘’이 빠진 이유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2021-03-29 19:52:43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3등 전쟁이 치열하다. 사실상 ‘새 정치’ 1등이기 때문이다. 낯선 얼굴들 사이 맨 마지막 15번 무소속 신지예(33) 후보가 익숙하다.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벽보 속 날카로운 눈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페미니즘 후보’로 새 정치 가능성을 확인했던 그다. 신 후보는 당시 원내 정당 후보를 제치고 4위에 올라섰다.
전임 시장들의 성폭력으로 시작된 재보궐 선거다. 또다시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울 것 같았던 그의 벽보에 쓰인 문구는, 뜻밖에도 “당신의 자리가 있는 서울”이었다. 한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도 담겼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호 15번으로 출마한 무소속 신지예 후보가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지난 23일 서울시 종로구 선거 사무실에서 만난 신 후보는 “서울에서 밀려난 이들을 대변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높아지는 집값과 임대료를 감당하기 벅차서 밀려나고, 위험한 환경에 일하다 죽는다. 성폭력과 성 소수자 혐오에 움츠러들고 장애인이라고 시설에 갇힌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배제되고 소외돼 있다.”
‘당신’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치 영역에서 호명되지 않았던 이들을 모두 포괄했다. 페미니즘을 확장해 ‘연대’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청년 여성의 얼굴을 한 신 후보가 대중을 설득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도전보다 더 단단해진 모습이었다.
여전히 뜨거운 지지 세력
달라진 건 ‘팀 서울’
2018년 지방선거와 이번 재보궐 선거를 비교해본다. 여전한 건 뜨거운 지지 세력이다. 지난 선거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연예인 팬 미팅 같던 그의 유세현장이다. 2030 여성들은 물론 투표권이 없던 10대 여성 청소년까지 선물과 편지를 들고 유세현장을 찾았다. 코로나19 시대 이런 광경은 볼 수 없게 됐지만, 지지자들 덕분에 무소속 후보에게 높은 후보 등록 문턱을 넘었다.
“5천만 원의 기탁금 후원 글을 올린 지 하루 만에 2천만 원 이상이 모였다. 모두 소액 후원자들이었다. 무소속 후보는 또 (후보 등록을 위해) 2천 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용지에, 정한 날짜·시간에 자필 서명으로 채워야 했는데, 4일 만에 모두 받았다. (지지자들이) 지인들과 함께 서명 부스로 직접 찾아와준 덕분이다. 이들의 힘으로 간신히 출발선에 섰다. 너무 감사하다.”
2018년 선거의 뜨거운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정치를 할 수 있었다고 신 후보는 말했다. “지난 선거는 저 혼자 만든 게 아니다. 8만2천 표를 모아준 유권자들이 있었다. 저는 청년 여성들의 열망을 느꼈고, 청년 여성들은 우리가 무언갈 바꿀 수 있다는 의지를 만든 계기가 됐다. 다른 세대에겐 새로운 세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 정치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종잣돈’이다.”
신지예 후보와 함께 '팀 서울'로 출마한 6명의 부시장들ⓒ신지예 선본
가장 큰 차이는 동료들과 함께 출마했다는 점이다. 신 후보는 6명의 부시장과 함께 ‘팀 서울’로 출마했다. 이가현 성평등 부시장·소란 기후위기생태전환 부시장·이선희 여성안전 부시장·공기 살림경제 부시장·은하선 성소수자 부시장·류소연 문화예술 부시장 후보가 러닝메이트다. 신 후보가 강조하는 ‘연대’의 가치가 출마 형식에서도 드러난 셈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다. 세대를 뛰어넘기도 하고 정체성을 뛰어넘기도 했다. 선거대책본부가 더 다양해지고 뿌리 깊어졌다. 초당적으로 모이기도 했다. 당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창당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 활동 영역의 사람들이 힘을 합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대로 나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치의 문법 자체를 바꿔내고 판을 갈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권력 분산적 정치시스템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같은 위력 성폭력 사건도 막을 수 있다고 신 후보는 말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박 전 시장은) 살아생전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훌륭한 사람이 어떻게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건 한순간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진 이들이 공공 영역에 자리하게 하는 건 중요하지만, 권력자가 부패하지 않도록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자체장 포함 대통령까지 제왕적 권력 위에서 힘을 휘두른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결과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팀 서울을 보면 연립정부, 연합정부의 줄임말인 ‘연정’이 생각난다. “팀 서울은 협력을 만드는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문제가 있을 때 서로 견제할 수 있다. 시장 밑에 부시장이 아니다. 서 있는 기반이 달라도 협상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다.”
ⓒ신지예 선본
“서울을 이렇게 만든 건 누구인가?”
신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성폭력뿐 아니라 ‘기존 정치’도 심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의 서울,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건 누구인가, 따져 묻고 싶다.”
“촛불 항쟁 이후 국민을 위해 무언갈 해보겠다던 문재인 정권은 계속해서 국민을 배신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마찬가지다. 조국 사태, 박원순 사건, 중대재해처벌법 누더기 통과, 차별금지법 미루기, LH 사태 등이 대표적이다.”
1번과 2번 사이에서 유권자들이 ‘협박’당하고 있다고 신 후보는 비판했다.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없다. 성폭력 가해자가 나오고 2차 가해를 서슴지 않던 (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를, 여성이라고 찍어줄까 하다가도 ‘엄마 정치’를 한다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싶다. 그렇다고 다른 당(국민의힘)의 유력 후보인 오세훈 후보를 생각하면, 그 당이 그 당에 내곡동 땅 문제도 있지 않나.”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이번 선거는 1년짜리가 아니다. 대선과 지방선거, 총선이 이어진다. 만약 여야 후보 득표율이 합쳐서 90% 이상이라면, (둘 중) 누가 당선돼도 서울이 이전보다 나아지지 못한다고 예감하는 유권자에게 더할 것 없이 처참할 것이다. 폐허가 된 정치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 하는 일이기도 하다. 될 것 같은 후보가 아니라 돼야 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자신의 표를 가장 값지게 쓰는 일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호 15번으로 출마한 무소속 신지예 후보가 2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2021.03.25ⓒ김철수 기자
지난 총선에서 ‘위성 정당’ 참여했던 진보정당들을 겨냥하며 신 후보는 “새 정치를 위해 판을 바꿀 용기도 의지도 없다”라고 질타했다.
“위성 정당 사태 당시 배지 하나 얻기 위해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휘말려 들어갔다. 처참했다. 그 결과 180석이라는 슈퍼 여당이 나타났다. 슈퍼 여당이 있어서 (민주당이) 중대재해처벌법을 누더기로 통과시키고, 박원순 사건을 이렇게 대응할 수 있었다. (위성 정당에 참가한 정당들이) 사건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는 아니지만, 스스로 정치적 가능성을 닫았다.”
“그들에게 정치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 원래 대변하려는 기후위기, 기본소득을 이야기하고 있나. 1석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국민 세금으로 의원 월급 받고, 정당 보조금 받는 것에 그칠 뿐이다. 민주당 2·3·4·5 중대 역할을 할 바엔 그냥 민주당에 들어가는 게 깔끔하다.”
신 후보는 ‘새 정치’를 표방한 정치인들의 몰락도 지적했다. 야권 단일화 후보에 전폭적 지지를 보낸 안철수·금태섭 후보가 대표적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이기든 지든 (국민의힘과) 합당한다는 메시지를 밝혔을 때부터 진 게임이었다. 안 후보가 말했던 제3의 길은 그의 손에서 나올 수 없게 됐다. 여야는 ‘단일화 쇼’를 하고 있다. 단일화 시간을 미루고 미뤄 본인들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런 상황은 정책을 말하기 어렵고, 원하는 서울시를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한국 정치는 10년 전으로 회귀했다. 여야 단일화에 골몰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선택지를 만드는 데 유권자가 힘을 실어줬으면 한다.”
신지예 무소속 서울시장 후보가 29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자 토론회에 자리하고 있다. 2021.03.29ⓒ국회사진취재단
성 평등과 주거 정책은 물론
기후위기부터 불평등까지
신 후보의 공약 틀은 크게 기후위기와 불평등 해소로 나뉜다. 2050년 탄소 중립 도시를 만들기 위해 ‘탄소경계선’을 지키면서도, 이 과정에서 불평등이 심화하지 않도록 ‘시민 생활 표준선’을 지킨다는 취지다. 영국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에서 빌려왔다. 이를 기반으로 성 평등, 주거, 돌봄 등 정책을 펼칠 계획이다.
성 평등 분야에서 눈에 띄는 건 ‘노동의 자리에서부터’ 성 평등을 이루겠다는 점이다. 신 후보는 ▲성평등임금공시제 확대 및 성별임금격차 조정 ▲서울시 성평등 임금 가이드라인 강화 ▲시민의 일상을 방해하는 의전 축소, 관용차 폐지 ▲시·출연출자기관 내 여성 대표성 강화 등을 내세웠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무관용 대처와 피해자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자치경찰제의 여성폭력 대응 체계 개편 ▲찾아가는 폭력예방교육 서비스 정기 시행 ▲사이버 성범죄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체계 구축 등이 대표적이다.
박 전 시장의 공약이었으나 보수 개신교에 저지당한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선포하고, 동반자등록조례를 실시하는 등의 사회정의 분야 공약들도 있다.
LH 사태로 이번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부동산 정책 관련 신 후보는 ‘매입형 공공임대주택’을 내세웠다. 매입임대주택은 공공 영역에서 기존 주택을 사들여 개보수한 뒤 취약 계층에 저렴하게 임대하는 방식이다.
“대규모 주택 공급 방식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서울은 이미 포화 상태다. 그러니 도로 위에 임대주택을 짓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집 없는 사람은 미세먼지·소음·흔들림 모두 감당하라는 건가. 공공이 나서서 주택을 매입해야 한다. 해외에서 많은 사례가 있지만, (국내 정치인들이)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표가 안 되기 때문이다. 토건 사업이 경기부양책 효과로 쓰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산 불평등을 낳는다. 서울시가 나서서 매입주택 비율을 20%까지 올리겠다. 자치구별 매입주택 비율 격차가 큰데, 이 부분도 맞추겠다. 그러면 시민들은 학교와 일터에 따라 임대주택을 옮기면 된다. 정상 가족 중심의 입주방식도 바꾸겠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기호 15번으로 출마한 무소속 신지예 후보가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나은 내일을 기대한다면 신지예를”
신 후보를 지지하는 유명인사들도 막강하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교수, 손희정 문화평론가 등 여성계 인사뿐 아니라 홍세화 장발장은행 은행장,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등 진보 인사들도 신 후보 후원회에 참가했다.
이중 홍 은행장이 SNS에서 밝힌 신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를 소개한다. “한국의 정치 현상은 ‘어제’가 좋았던 야당과 ‘오늘’이 좋은 여당이 서로 내일도 갖겠다고 쟁투를 벌이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은 내일을 기대한다면 제3의 정치세력에 표를 줘야 한다”
신 후보는 “우리는 우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집단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에 집을 수 채씩 갖고 있고, 재산이 몇십억 몇천억이 되고. 나는 물론 내 아들딸도 가질 수 없는 스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사람들은 절대 일반 시민을 대변할 수 없다. 변화를 위해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포기하는 순간 그 자리에 우릴 포기하게 만든 정치인이 자리한다. 더는 밀려나지 않도록 관심과 힘이 필요하다.”
신지예 벽보에서 ‘페미니즘’이 빠진 이유 - 민중의소리 (v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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