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http://cafe.naver.com/korailslr.cafe <철도사진 SLR 유저그룹>에서 퍼왔습니다.
앞서 일본철도가 한국철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우리 근대사에 긍정적으로 풀어냄으로써 한국철도만의 고유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이번에는 철도문화의 고유성을 찾을 수 있는 유형적 요소들을 목록화 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1. 운송수단
1) 철도차량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를 달린 증기기관차, 6.25 이후 우리나라를 달리기 시작하게 된 2000~7500대의 수많은 종류별 디젤기관차, 시멘트 화차 하면 떠올리게 되는 8000호대 전기기관차나 철도의 전철화 이후 어느새 영동-호남-중앙-태백선에서는 대세가 되고 있는 8200대 전기기관차, 기관차와 객차가 일체형인 NDC기관차나 EEC, DEC, CDC 같은 기관차까지... 여객/화물운송을 담당하는 기관차는 철도의 심장이자 머리로서 많은 철도동호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일반인들은 전기기관차/디젤기관차/몇호대인지 꼼꼼히 알지 못하더라도 디자인이나 색상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어른들의 기억에 뚜렷히 남는 기관차는 비둘기호와 통일호를 줄기차게 끌고 다니던 호랑이도색 (별칭 '어흥도색') 기관차일 것이다. 기관차의 종류가 아니라 도색으로 기억되는 것이 현실인 만큼 도색은 별도로 구분하지는 않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열차를 구분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된다. 도색에 대해서는 추가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2) 여객열차
지금은 KTX, 새마을, 통근열차로 구분되는 간단한 등급체계를 가졌지만, 과거에는 무수한 열차명이 존재했었다. 일본처럼 노선별로 각기 다른 이름도 있었고, 의미를 별도로 부여하고 부르던 때도 있었다. 융희호, 아카츠키, 재건호, 해방자호, 맹호호, 관광호와 같이 각 열차마다 의미를 부여하거나 특징적인 요소를 토대로 열차명을 정하던 시기에 비해 지금의 등급체계는 조금 건조한 느낌이 든다.
KTX를 등급화 하자는 여론이 철도동호인들을 중심으로 일부 있지만, 그런 등급화가 아니라, 각 열차별로 명칭의 특징적 차별화를 시도하는 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받고 열차명을 판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효자~제철역을 오가던 통근열차는 '제철호' 나 'posco train'같은 의미있는 열차명을 붙이고 운행했더라면 어땠을까? 서울-용산-수원역을 오가는 삼성호(삼성전자 출퇴근용)라든지, 구미-동대구를 오가는 'LG Philips호'같은 명칭이 거부감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건조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기업명을 예로 들었을 뿐, 해당 철도노선에 충실하게 짜고 말고는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얘기가 옆길로 샜는데, 아무튼 여객열차는 그 명칭이나 역사, 이용계층 등에 따라 추억의 종류나 패턴이 다르게 나타나는 만큼, 이런 요소들을 그저 단순한 '옛날열차'로 치부하지 말고,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고 조명할 필요가 있다. 비둘기호가 주는 상징적 요소가 얼마나 많았던가? 불과 3년 전에 사라진 통일호 역시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안고 사라졌는가? 그들이 전해준 스토리를 과장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를 관심갖고 풀어주기만 해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3) 그밖의 열차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기관차나 객차 정도만 인식할 뿐, 그 외의 열차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철도 내지는 궤도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정비차가 있으며, 동력이 인력인 핸드카나 작업용 수레 (레일 위에 두 개의 바퀴를 놓고 끌고가는 보선장비), 레일바이크, 광차, 전차, 귀빈차, 모노레일 같은 많은 종류의 궤도 위를 달리는 열차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달리고 있음을 관심있게 알리는 일은 중요하다. 철도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이 수많은 차량들은 철도라는 인생의 축소판 속을 기능하는 다양한 메뉴일테니 말이다.
전국에 산재한 증기기관차나 광차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저 반공전시관에 전시된 탱크처럼 '전시물'로서만 기능할 뿐, 철도가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능해 왔는지 보여주는 산증인이 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얼마 전까지 개인소유로 일산 고양동에 방치되어 있던 #9165 협궤열차의 폐차처리는 그런 점에서 아쉽고, 기능을 다하고 대부분 폐차처리 된 차장차들 역시 그 의미를 되새겨보기 전에 깔끔히 정리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같은 맥락에서 철도박물관에 전시된 차량들이 단순히 우리 역사 속을 달려왔다는 정도의 안내문과 실내조차 제대로 감상할 수 없게 박제된 채 전시되어 있음은 늘 아쉬움을 남긴다. 거친 우리의 철도수집문화도 문제이긴 하지만, 보존 때문에 문을 꽉꽉 걸어잠근 객차들을 보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4량의 협궤객차와 협궤기관차, 파시&혀기 증기기관차, 우주관광열차로 변신한(-_-;;)가와사키 동차, 비둘기호 객차, 통일호 객차, 귀빈차, 초기형 전철, DEC동차를 보고 나면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 아쉬움이 떠나지 않음을 느낀다.
속도와 느림은 각자의 영역에서 상생할 수 있다고 지금도 나는 믿는다. 속도경쟁에서 승리한 KTX의 이면에서 간이역들이 문화재로 인정받고 제 역할을 조금씩 제 갈길을 찾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더더욱 그 믿음은 커진다.
2. 철도시설
앞서 철도차량에 이어 철도문화라 할 수 있을 만한 철도시설을 살펴보자.
수인선을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사람들의 프로젝트인 '협궤변 리터러시'에서 이수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한 것은 기록하지 않죠...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일이다. 존재의 상실은 물리적으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 정신 속에서도 일어나게 되는데, 물질이 사라지면 정신도 뒤이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게 우리의 한계다. 이별하기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가 더이상 볼 수 없게 된 옛 연인을 떠올리면 갑자기 그리워지는 이유가 그동안 함께 해 온 시간들과 추억들 때문이듯, 우리 곁을 사라지게 되는 철도시설들에는 그만한 사연과 추억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철도시설의 제1과 2는 간이역과 폐선이라고 생각한다.
간이역과 폐선
간이역은 우리 근대 지역사의 출발점이며, 폐선은 우리 근대 지역사의 연결고리가 된다.
어떤 사람이라도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 길은 고달팠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간이역에는 1개의 사연이 더해지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이역 입구를 통과하여 기차를 탔고, 서울역 출구를 나와 세상과 맞서 자신과의 승부를 걸었을 것이다. 간이역 하나에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은 그래서 소중하다. 이런 얘기들을 담기에는 21세기가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적어도 그 간이역과 폐선을 보존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더 가치를 갖게 되고 나아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준다.
전철기
철도가 흔히 인생과 비유되곤 하는데, 그중 단골메뉴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전철기 아닐까? 삶의 갈림길을 뜻하는 데 이것만큼 절묘한 비교대상도 없을 것이다. 어디로 꺾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행선지, 논산훈련소 입영열차가 서대전역에서 두 개로 나눠지며 떠나는 그 느낌...
터널
터널은 삶의 위기나 어려운 시기를 뜻한다. 터널을 무사히 통과해야 다음 삶이 이어지고... 그래서 철도마니아 중에는 터널마니아가 따로 있을 정도다.
특수시설
루프터널, 스위치백, 인클라인, 대피선, 피난선 같은 특수시설은 언제나 동호인들의 관심사가 되는데, 아무래도 특별한 것에 관심이 가고 또 특별한 것을 조사하고 알리는 일은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통표와 통표걸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참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 보면 승차권과 신호체계가 아닐까? 그중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통표와 통표걸이인 듯 하다. 신호체계 전체가 바뀌면서 이제 통표걸이에 통표 거는 모습이 희귀사진이 된 걸 보면 희소가치라는 것은 역사적 가치를 떠나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완목식신호기
수동식전철기와 자동전철기의 관계처럼 자동신호기에 대해 완목식신호기는 사람의 손길로 관리되는 역 구내의 대명사가 된다. 게다가 이놈은 철길의 풍경을 좀더 풍요롭고 상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옛 전라선 서도역에 남아있는 완목식신호기나 북평선 삼화역 초입, 문경선 주평역 초입에 남아 아직도 기능하고 있는 완목신호기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철도풍경이다.
각종 표지판
사진찍기 좋아하는 철도마니아들의 주요 피사체가 되는 '정지' 표지판이나, 엄청난 경사(구배)를 보여주는 경사표시표지판, 귀여운 '제동주의' 표지판, 상당한 곡선을 나타내는 250 이하의 곡선반경 같은 표지판에 담긴 의미와 상징성을 잘 이용한다면 일반인들도 철도를 더 잘 이해하고 좀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자동차도로의 각종 표지판이 여러가지 상징성을 가진 아이콘으로 쓰이고 있는 걸 보면 너무 over한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보선사무소 / 정비고 / 화물홈 / 관사
대한통운 화물홈, 선로보수반 사무소, 관사 할 것 없이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대개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최근에 사라진 것으로 영동선 법전역, 문경선 불정역 선로보수반 건물이 있지만, 도경리역처럼 관사가 함께 근대문화재로 지정된 경우도 있다.
이설구간 덕분에 용케 살아남은 옛 충북선 산척역 관사나, 지금도 마을의 한 부분으로 제기능을 다하고 있는 영동선 옥계역 관사, 중앙선 이하역 관사 같은 건물들, 정비반 건물이 철도역사보다 더 아름다운 문수역 선로보수반 건물, 골약역 선로보수반 같은 건물들, 시대를 알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상태로 잘 정비되어 있는 중앙선 옹천역 화물홈, 우보역 화물홈, 경북선 용궁역 화물홈 같은 건물들은 문화재를 거론하기 이전에 철도공사에서 철도사의 한 부분으로 좀 챙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급수탑
급수탑은 그 존재가치를 먼저 발견한 학자들에 의해 상당수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상태다. 문화재 지정과는 별개로 급수탑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고,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면 지금처럼 급수탑이 천대꾸러기가 되어 문을 굳게 걸어잠근 채 방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급수탑은 그 시대 토목건축기술력의 결정체이며, 당시 과학기술의 집약체다. 철도라는 것이 이미 당시 교통기술의 집약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급수탑이 문화재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음에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석가탑 모시듯 입구 꽉꽉 걸어잠그고 외형만 감상하라는 것은 황당한 일이며, 그나마 외형 감상하라는 안내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나마 연천역 급수탑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존재일 뿐, 수원역 한 켠에 연대도 알 수 없는 (1930년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적벽돌 급수탑이나 옛 신흥리역에 있던 급수탑 등은 완전히 방치되어 나뒹굴고 있다. 하긴, 살아있는 간이역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가는 마당에 급수탑 따위를 논하기에는 성급한 감도 있다.
이상과 같이 표면적으로 눈에 잘 띄고 상징성 있는 철도시설만 살펴봐도 챙길 만한 게 산더미인데, 그밖에도 언급하지 않은 많은 시설들이 자신의 가치를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면 대매소로 하루 500명 이상의 승객이 이용하던 경북선 미룡역사의 경우 폐역되기 직전, 그러니까 1990년 이전까지 쓰던 옛 시각표가 맞이방 한 켠에 방치되어 있는데, 비둘기호 미룡~김천 구간이 160원인 시절의 것이며 이런 건 철도박물관이 제자리라 생각된다.
그밖에도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가는 수많은 옛 철도시설, 그리고 현재의 철도시설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 삶 속에서 한번쯤 조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지 살펴보는 여유가 아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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