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시인이자 열차승무원으로 근무하시는 김영기 님께서 주신 시집입니다.
늦었지만 철도원 생활 틈틈이 쓴 시인의 시 몇 개를 옮겨 봅니다.
전라선
산이 산을 비껴주고
기억이 기억을 비껴주는 섬진강 따라
기적에 놀란 은어가 파닥인다
길이 길을 찾아주고
추억이 추억을 찾아주는 지리산 따라
칸에 칸을 물고 가는
연결기 삐거덕거린다
감성의 맨살에 닿는 듯
숨결 따라 그려지는 초상
낡은 차창에서 덜컹거리고
쫓아가도 끝없는
묻어도 묻히지 않는 소실점 사이
외길 인생은 어느 지점에서
자꾸 주머니를 뒤져 승차권을 찾지만
절반은 아름답고
나머지는 애달픈
여수 가는 열차
타면 언제나 스물한 살.
가창오리 군무
금강의 저녁노을 속에 불타오르듯
한바탕 법석을 떨다 사라진 오리들은
인근 논밭으로 출근했단다
경마장의 말처럼
일제히 대문 박차고 나가
거리고 쏟아지는 사람의 풍경과
무엇이 다를까마는
텅텅 빈 가슴으로도 날지 못하고
전철 안에서 떼 지어 흔들리는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지구의 반을 돌아와서도
천연덕스럽게 직장잡고 일하는
저놈의 가창오리 때문이다
첫 차에서 만난 승객
출소증을 내보이며
기차를 어떻게 타는 거냐고 묻는다
12년만의 귀가란다
교도관하고 비슷한 제복을 입은 내가
객실 순회 할 때마다
올려다보는 흰자위가 소 같다
어떻게 살아야하느냐고 묻지 않길
천만 다행이었다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차창에 비춰지는
그의 수심 깊이를 가늠하다말고
아버지로 살아갈 길이
철도노선만큼이나 복잡해 보였다
연리지
담도가 막혔단다
암이란다
나무로 말하자면
엽록소 흘러가는 통로쯤이
막힌 거나 다름없다
비바람 비집고 들어와
아무리 흔들어대도
잡은 손 놓을 수 없으니
부름켜 잇고
유세포 섞어서 이제는
남아있는 내 목숨으로
당신을 살려내리라
연리지를 보면서 생각한다
사람이 어찌 나무만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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