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치유자, 램지 림 교수를 만나다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의 기억>으로 제7회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찾아
제7회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만난 램지 림 보스톤 칼리지 심리학과 명예교수(73세)는 영화제 안보다 영화제 바깥에서 더 많이 알려야 할 사람이다. 그의 선친 임창영은 독립운동가였다. 1933년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1935년까지 뉴욕 한인교회 목사로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38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아마 이 과정 전체 동안 상해임시정부에 관계하면서 미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일제 치하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종의 정치적 망명을 했던 셈인데 해방 후인 1948년에는 서재필의 개인비서로 잠깐 귀국하지만 1949년 다시 미국 행을 택한다. 이후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장면 내각 하에서 유엔주재 한국대사로 임명됐으며,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사임했다. 아들 램지 림 교수가 왜 한국전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는지, 분단 70년이 넘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해 지성적으로 고통스러워 해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램지 림이 그의 동생의 부인인 디엔 보르셰이 림(한국명 강옥진. 입양아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 56세)과 함께 지난 2013년에 만든 38분짜리 단편 <잊혀진 전쟁의 기억>은 뒤늦게 올해나 돼서야 DMZ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어쩌면 ‘분단 70년 특별전 상영작’으로서는 최적의 작품이었던 셈이다. 이 영화 <잊혀진 전쟁의 기억>은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재미동포 4명의 개인적 체험을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념의 분단이 이들에게 어떠한 희생을 요구해 왔는가를 담담한 필치와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도 그 어느 기록보다 더 생생하고 새롭다. 인터뷰어들 네 명 모두 북한도, 한국도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개인사야말로 6.25 전쟁이 가져 온 비극의 최 정점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어쩌면 일상의 역설은 이렇게 흔히들 잘 알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는 일인 듯 하지만 깡그리 잊고 사는 일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6.25 전쟁에 대해 우리는 전부 다 잘 알고 있는 가. 과연 그런가.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 가. 아니면 지난 70년 동안 특정한 정파의 생각만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 같은 질문에서 시작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6.25 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제쯤이면, 그리고 어느 정도 식자 층에 포함된 사람들이라면, 대체적으로는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건 더 이상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놓고 벌이는 이분과 흑백의 논쟁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브루스 커밍스의 입을 빌어 근인(近因)은 명백한 북의 남침으로, 그러나 원인(遠因)은 38선 접경 지역에서 끊임없이 벌어졌던 수많은 국지전의 양상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의 특이성은 전쟁을 겪은 후 미국 행, 곧 3국 행을 선택했던 민간인들의 증언을 촘촘하게 엮어 냈다는 데에서 찾아진다. 마치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나고 있는 듯한, 신기루의 느낌을 준다. 어쩌면 전쟁에 대한 남북의 기억은 모두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왜곡된 기억은 잊혀진 기억과 다름이 아니다. 이 영화야 말로 6.25 전쟁에 대한 진실의 기억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2013년 아시안 아메리칸 국제영화제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열린 '아시안즈 온 필름 페스티벌'에서도 최우수 단편영화상과 최우수 음악상을 수상했다.
임창영 –램지림으로 이어지는 가계(家系)가 대한민국과 이어지는 끈은 2대(二代)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면 드라마가 부족하다. 램지 림의 혼혈 쌍둥이 딸 중 둘째인 임월산(37)도 살펴봐야 한다. 이 외국인 처녀는 현재 국내에서 열혈 노동운동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임월산은 현재 민주노총 산하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에서 대외협력실 국제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페이스 북 프로필 사진은 어느 파업 투쟁 현장에서 머리에 단결! 투쟁! 등이 적힌 빨간 띠를 두른 채 선동 군무(群舞)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녀는 미국 NYU에서 미국과 한국사를 동시에 전공하면서 세계 노동운동의 핵심, 그 약한 고리는 바로 한국 노동운동에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녀는 2008년 한국으로 왔으며 서울 독산동의 조그마한 거처에서, 역시 노동운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연인과 함께 세상의 개혁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램지 림 교수와의 인터뷰 통역은 딸 임월산이 직접 맡았다.
딸이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본인의 삶인데 뭘 그걸 어쩌겠냐는 듯 그저 웃음)
한국에 대한 관심은 선친의 영향 때문인가, 아니며 당신의 정치적 성향때문인가.
물론 두 가지 다이다. 10살이 되기 이전부터 나는 한국이 아버지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아버지는 노심초사하셨다. 종전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건 오히려 나였다. 라디오를 듣다 전쟁이 끝났다는 뉴스를 듣고 2층에서 뛰어 내려와 아버지께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조국은 하나다’라고. 어쨌든 이 다큐를 만들게 된 것이 그런 개인적인 성장 환경이 영향을 미쳤던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꼭 그것 때문만도 아니다. 내가 학자로서 지향하는 정치적, 학문적 목표와도 역시 관계가 없을 수 없다. 나에겐 한동안 멘토가 있었는데 칠레나 아르헨티나, 살바도르 등 남미 문제에 대한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에게 배운 건, 전쟁으로 인한 상처나 정치적 탄압, 학살, 고문에 따른 트라우마는 사람 몸 속 깊이 배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국가는 끊임없이 지우고 은폐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상처를 스스로 드러내게 해야 하고 말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들어줘야 한다. 한국전쟁 역시 그 같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많이 양산해 냈고 또 여전히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분단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대한 정치적 관심은 꼭 한국전쟁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노근리 사태일 수도 있고 4.3 제주항쟁일 수도 있으며 광주민중항쟁일 수도 있다. 왜 6.25인가?
분단 70년째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분단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많은 일을 겪어 왔다. 그 중 상당부분이 여전히 답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 특히 현대화 이후의 모든 문제에 있어 해답은 한국전쟁에 있다고 본다. 내가 이 시기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정전이니 휴전이니 하는 의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포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들을 치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 때문에 아팠던 사람들, 심지어 그 아픔조차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얘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잊혀진 전쟁’이라는 단어를 쓴 건가?
오 그건 아니다. 여기서 ‘잊혀진 전쟁’은 한국전쟁을 가리키는 일종의 고유명사이다. (예를 들어 특정 전쟁을 가리켜 ‘추악한 전쟁’으로 명명하듯이 – 편집자 注) 그래서 그냥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다른 전쟁에 비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나 리써치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전쟁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미국사회에서 이 한국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래도 좀 낮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겠다.
196, 70년대에 민권운동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그때에 그러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싶다.(웃음) 모두 다 뉴 레프트였다. 베트남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하고 움직여 나가게 했다. 그러나 일부 에이시안 아메리칸(Asian-American)들의 생각으로는 그것조차 백인 중심주의라고 봤다. 사회운동도 인종주의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에이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만들어졌고 그 면면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아마 내가 로체스터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요즘 정부가 부쩍 통일론을 내세운다
쉽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상황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통일은 어려울 것이다. 역시 통일이라는 것은 ‘people to people’의 관계로 풀어 나가야 한다. 아주 간단한 일부터. 이산가족이 만나고,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얘기하며 공유하고, 자신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 반성하고…그렇지 않고서 정치적 군사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이른바 ‘486 세대’의 좌절감이 요즘 말이 아니다.
(웃음. 어깨를 툭툭 치며) 어디 안 그런 나라, 안 그런 사람들이 있겠는가…
<잊혀진 전쟁의 기억>의 2부, 3부가 계속 나올 것으로 기대해도 좋은가.
(웃음)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다. 다큐멘터리스트도 아니고. 공동 작업한 디엔과도 처음엔 논쟁이 많았다. 그녀가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나는 심리학자로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계속해서 발굴하고 꺼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비극의 역사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http://artmu.mmca.go.kr/interview/view.jsp?issueNo=90&articleNo=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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