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매우 중요한 저작을 (다소 난해한 부분이 있어 재독하고서야 만족했지만) 우리 글로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원문을 함께 참고했으면 이해하는 데 훨씬 수월했을텐데...
2.
우선 제목을 비롯해 몇 군데 번역상의 실수가 눈에 띈다. 제목은 '조직 유발 사고로 인한 리스크 관리하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인재는 이제 그만'이라는 제목을 크게 부각시켜 달았다. '인재'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선 어떤 맥락으로 쓰이는지에 둔감하거나, 주류 안전학의 입장에 편승한 시각이다. 정작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은 '인적 사고' 또는 '개인 유발 사고'로만 접근하는 태도의 한계를 다루고 재발 방지를 위해서 사고 이면에 존재하는 잠재 원인 -관리, 조직적 측면- 에 대한 접근을 돕도록 하고 있다. 그러려면 결국 좋은 안전문화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부제목 정도로 보이는 '안전문화 구축하기'가 그런 의미인데 어째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느껴진다.
3.
또 다른 번역상 오류가 보이는데, 예를 들면 performance에 대한 번역을 들 수 있겠다. 이 단어는 전후 맥락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인적 '성과'와 인적 '수행' 사이에서 묘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안전 측면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하나, 안전을 저해하는 성과주의와 같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 몇 군데는 중대한 오역이 있다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4.
최근 스위스 철도를 방문했을 때 동행한 분이 이 책의 저자인 제임스 리즌을 언급했다. 아마도 위험 사건의 영역을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모델이 제임스 리즌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으로 기억된다. 내 지식이 짧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카테고리 분류는 비슷한 모형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제임스 리즌, 물론 그 때 나는 이 책을 두번째 읽고 있었음에도 미국의 학자라고 틀린 소리를 했었다.(누구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리즌의 핵심적 주장은 모든 사고 -개인 책임으로 원인 규명된 사고까지를 포함한- 전체 사고의 약 80%는 조직 유발 사고로 보이며 심층적 원인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임스 리즌의 '조직 유발 사고 vs 개인 유발 사고' 개념은 일본의 이시바시 아키라가 주장한 '당사자 에러 vs 조직 에러'와 비슷한 맥락이다. 조작 미스나 깜박하여 놓치는 행위 등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당사자의 에러 원인이나 내용이 개인의 휴먼 팩터 범주가 아닌, 기계가 좋지 않은 상태였거나 부적절한 절차서 및 불충분한 훈련, 또는 작업 환경과 관련된 준비 부족이나 일부 작업자에게 편중된 근무시간과 같은 관리 문제 등 조직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인 경우가 많으며 이를 총칭해 '조직 에러'로 규정한다. 곧 '조직 유발 사고'와 흡사하다. 조직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적하기 어렵고, 해결책도 간단하게 구축할 수 없기 때문에 심층적 원인 진단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밝힌 대목도 정확하게 일치되는 지적이다.
5.
이 책은 개인 유발 사고 내지는 인적 오류 중심의 접근법의 한계를 넘어 공학적, 조직적 접근법을 병행해야 하는 이유를 매우 설득력 있게 서술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안전전문가들로 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제임스 리즌의 이 저작은 왜 외면받는 것일까? 사고를 이해하는 모델 중 그의 '스위스 치즈 모델'은 언제고 빠짐없이 등장하지 않은가. 안전문제에 대한 계급적 사고가 우리와는 다르게 존재하는 걸까? 우리 사회에서 안전 문제를 주도하는 전문가 그룹의 왜곡된 시각이 떠오를수록 개탄스럽다.
6.
제임스 리즌이 주장하는 좋은 안전문화는 보고문화, 공정문화, 유연문화, 학습문화, 그리고 그를 이어주는 정보문화이다. 4가지 안전문화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보고 문화 : 구성원이 위험이나 근접사고(아차사고)에 대해 보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조직 분위기. 보고 활동의 질과 양을 결정하는 영향 인자는 "①안전사고를 보고하였을 때 정당하지 않은 징계가 있어서는 안된다. ②비밀유지와 보고자를 식별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③자료 획득과 분석을 담당하는 부서와 징계나 제재를 담당하는 부서를 분리 운영해야 한다. ④보고사항에 대하여 신속하고 유연하며, 접근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피드백이 이루어져야 한다. ⑤쉽게 보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정 문화 : 공정문화는 신뢰분위기를 형성하여 필요한 정보 제공을 서로 조장하고, 때로 보상을 주며, 허용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행동에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 공정문화는 모든 사고나 불안전 행동을 처벌하는 것은 잘못이고, 모두를 처벌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즉, 악의적 행위, 태만 등에 의한 불안전한 행동은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고의성 없는 사고에 대하여 개인을 무차별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유연 문화 : 고신뢰조직은 위험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스스로 본래 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유연문화는 평소 전통적 · 수직적 조직 구조를 위기시에는 수평적 · 직능적 구조로 변환할 것을 요구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위기관리 기능을 계층구조의 상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현장관리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선 감독자의 경험과 능력 그리고 이들에 대한 신뢰가 존재해야 한다.
□학습 문화 : 학습문화는 조직의 안전정보시스템으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 변화가 필요할 때 변화와 개혁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다. 학습문화는 관찰하기, 창조하기, 행동하기의 세 가지 차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학습은 사고와 근접사고로부터 잘못된 것을 수정하게 한다.
위와 비교해 우리 한국 철도의 4가지 안전문화는 '①원활한 의사 소통과 자유로운 문제제기를 장려하는 보고하는 문화, ②정해진 법령 및 규정과 절차, 매뉴얼을 준수하는 지키는 문화, ③안전의 확보를 위해 조직과 직책을 넘어 일치하는 협력 문화, ④사고사례로 부터 배우는 학습하는 문화'이며 최근 신임 홍순만 사장이 들어서면서 ①항이 '원활한 의사 소통과 자유로운 문제제기를 장려하는 토론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이 변화에 대해 굳이 평하자면, -드라마 W의 대사처럼- 도무지 무슨 맥락인지 알아내질 못하겠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제임스 리즌이 주장하는 안전문화와도 차이가 보이지만, 노르웨이 등 북유럽 철도, 독일과 스위스 등 서유럽 철도, 영국 철도 등과 비교해서도 차이(품격과 철학!)가 존재한다. 이 차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어느 작가의 말처럼 '30년에 300년을 살아낸' 사회 발전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중첩된 과도기적 잔재가 여전하고 억압 통제적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점, 그리고 그마저도 액자 속 문구에 불과하다는 문제점을 우선 밝혀둔다.(몇 번 읽어보면 그런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노사간 논의 과정에서 제임스 리즌의 견해와 비슷한 내용을 언급했을 때 슬쩍 비치던 사측의 웃음이 떠오른다. 그 웃음은 마치 철부지 아이가 내뱉은 어설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나 나올듯한 표정이었지 싶다. 난 이제 반대로 그들의 태도에 슬쩍 슬퍼지려 한다.
7.
스위스 철도의 안전문화를 설명할 때 자기 조직의 최종 목표는 '고신뢰조직(HRO)'이라고 설명했다. 놀랍고 부러웠다. 안전문화를 변화시켜 고신뢰조직으로의 전환을 위해 몇 해 동안 계속되는 토론 과정이 또한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안전문화의 핵심 강령들도 놀라운 것이었다.(스위스 철도의 안전워크샵은 토론 '결과'로 무얼 얻을지보다 지난한 '과정' 자체에 핵심이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몇 사람의 시각은 나와 달랐다. 그다지 중요성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제임스 리즌의 이 저작을 관통하는 기본 조직문화가 '고신뢰조직'에 닿아 있다. 스위스 SBB의 관계자에게 '고신뢰조직'에 대한 부연 설명을 부탁했을 때, 유연문화 등을 언급하며 제임스 리즌의 것과 같은 주장을 설득력있게 내놓았다. 그냥 적어 놓은 단어가 아니란 뜻이다. 우리의 그냥 적어놓은 것에 불과한 4대 안전문화와 달리 말이다. 스위스철도와 우리 철도가 다른 건 그 사회와 우리 사회의 차이나는 딱 그 만큼(!), 실은 매우 엄청난 사회적 수준의 차이일 것이다.
8.
수없이 많은 철도 안전에 대한 주장들 속에서 우린 어떤 방향을 잡고 갈 것인가? 개인 책임을 묻는 통제적 문화가 짙게 깔린 현장을 바꾸는 일은 어디에서 시작할 수 있나? 개인과 집단이 철도 안전을 위해 스스로의 자발적 책임을 다하고 행동하는 것, 안전 관심사항을 원활하게 대화하고 배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며, 실수를 교훈 삼아 행동을 수정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도록 보장하는 문화! 제임스 리즌은 이런 이상적인 안전문화는 현실 세계에서 이룰 수는 없으나, 추구해야 할 목표인 것 만큼은 틀림이 없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우리에겐 억압적이고 불합리한 철도 현실을 바꾸는 든든한 근거가 될 것이다.
근래 발생했던 철도 사고들의 교훈은 무엇일까? 단연 '이제 우리도 단편적인 사고 대응을 넘어 조직 안전 문화의 새로운 전환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가? 여전히 우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향해 걷고 있다.
(2016년 7월)
제임스 리즌의 안전문화와 스위스 철도
-제임스 리즌의 'Managing the Risks of Organizational Accidents'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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