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데 카이로의 봄은 언제 오려나.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임을 자랑하는 이집트,
오늘도 나일강 유유히 흐르는 파라오(절대군주)의 나라 이집트,
언제나 아무 일 없을 것만 같던 이집트에서 화산과 지진보다 더 무서운 사태가 8일 째 일고 있다.
빈부격차 사회양극화로 이집트의 지각은 갈라지고 식품가격 폭등으로 굶주리는 빈민들은 "빵을 달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사망자 1백 명을 낸 유혈충돌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불안은 여전하다. 나일강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낫세르가 ‘해방’을 뜻하여 명명한 카이로의 ‘타흐리르광장’에는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진지를 사수하고 있다. 예전에 못 본 광경이다. 드디어 경찰 대신 군을 투입했으나 시민들은 “군은 이집트와 무바라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31년 독재정권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하는 1백만 행진을 앞두고 이집트를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카이로 공항은 북새통이다.
무바라크의 버팀목인 미국의 태도는 애매하다. 힐러리 클린턴이 “이집트의 정국은 안정되어 있다”며 무바라크 지지를 공식적으로 표명한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이집트의 민주개혁을 촉구”하는 국무성과 백악관의 목소리는 오락가락 하였다. 오늘도 야권세력은 ‘거국정부’를 논의하고 있는데 오바마는 무바라크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채 민주개혁만을 지속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이집트는 왕정 아닌 대통령제인데도 의미상으로는 여전히 파라오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지난 60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해온 4명의 대통령제 파라오를 돌아보고 이집트의 미래와 함께 세계의 미래를 내다보자. 그나저나 카이로 봄은 언제 오려나?
나일강의 호랑이 낫세르
1952년 낫세르 중령이 주도하는 자유장교단이 나기브 참모총장을 앞세우고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렸다. 대표적 아랍민족주의자 낫세르는 61년에 516군사쿠데타로 우리의 419혁명을 뒤엎은 박정희대통령의 한국적민족주의와 겉보기는 흡사하나 내용은 정 반대였다. 그는 1954년 나기브 대통령을 밀어내고 대권을 장악한 후 미-소 냉전체제에서 비동맹 외교정책을 주창하면서 아랍세계는 물론 제3세계의 지도자로 올라섰다.
모택동을 대신한 주은래 수상, 인도네시아의 스카르노 대통령' 그리고 낫세르 대통령은 제3세계 외교를 주도하는 삼총사였다. 또 왕정 아닌 공화정 체제로 아랍세계를 통일하려 했던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보수왕정 국가들에 자신의 혁명철학을 수출하였다. 이스라엘과 보수 아랍왕정국가들을 지원하고 있는 서방세계에 대항하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권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여 아랍민족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다.
56년에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스에즈운하를 되찾는 국유화를 선언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조직 지원하였다. 석유 없는 이집트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의 보호자적 위상을 확보하는 기초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 아랍세계의 맹주로 우뚝 서게 하였다.
그러나 1956년과 67년 두 차례 중동전쟁을 주도했으나 '마사다 요새'의 후예인 이스라엘군에게 참패하였다. 특히 67년의 대 이스라엘 전쟁에서 시나이반도를 통째로 잃은 나세르는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그 후 권토중래하기 위해 고심하던 나일강의 호랑이는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실리추구로 돌아선 사다트
부통령으로서 대권을 이어받은 사다트는 낫세르와는 다른 길을 갔다. 이집트 경제를 살리기 위해 친미 외교와 이스라엘과의 평화, 그리고 아랍민족주의 대신 이집트의 국익우선 정책을 선택하였다. 72년에 소련의 군사고문단과 기술자들을 추방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개선과 67년 이전의 국경회복을 UN에 주장하였다. 73년에는 시리아와 연합하여 시나이반도 일부의 실지를 회복하고 이스라엘과 미국에게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 미국 주도 아래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그의 정책노선이 잘 드러났다.
77년 최초의 이스라엘 방문자로서 이스라엘 의회에 평화계획을 제안, 78년에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 79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사다트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소외시킨 가운데 팔레스타인 문제를 뒤로 미루고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축으로 한 중동평화회담에 합의했다. 그 대가로 사다트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후 미국의 무기수입국이 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배제한 반쪽짜리 중동평화회담을 성사시킨 사다트의 실리외교로 이집트는 아랍연맹과 이슬람회의로부터 추방되고 아랍세계에서 고립되었다. 또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정치・경제・군사적 후원자인 이집트를 잃게 됐고, 아랍국가들 사이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민족과 종교적 연대를 경제적 실리로 대체하려던 사다트는 왕년에 그가 혼신의 열정을 부었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81년에 암살당했다. 그가 시나이반도 일부를 되찾았던 4차 중동전을 기념하는 대규모 군사퍼레이드 사열대 위에서였다.
사대주의 실무집행자 무바라크
81년 당시 부통령으로서 대권을 이어받은 무바라크 시대는 국제정치와 지역정치에서 급격한 정치변동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이즘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 하고 대 소련 군사적 경제적 무한출혈 압박이 가속되던 시기였다.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그라스노스트(개방)정책의 밑바닥으로부터 동구 사회주의권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990년대 초 동유럽과 소련이 무너지고 미국의 독주가 시작됐다. 무바라크의 친미정권에 호시절이 온 것이다.
한 편 1987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중봉기 (인티파다)로 1천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에게 희생당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인티파다 주도세력이었던 무슬림형제단의 아메드 야신이 주도하는 하마스가 주도적 강경세력으로 등장하는 대신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이유로 국내에서 억압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권위주의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저항에 부딪치게 됐다. 이런 상황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첫 대면인 마드리드 회담, 땅과 평화의 교환이었던 오슬로 회담을 성사시키는 계기가 됐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미국의 비호아래 오슬로 협정을 이행치 않고 ‘가자지구’에서 보듯 침략과 학살만행을 계속하고 있다.
또 아프칸과 이라크 침공에서 보듯 아랍권은 미국의 제국주의에 각개격파 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이집트는 아랍 동포에게는 눈도 입도 손발도 없는 식물 존재, 아니 그 보다 더한 미국의 주구에 다름 아니었다.
친미사대주의 독재정권의 말로는 다가왔는데
7천 5백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에 2$로 연명하는데 최고급 벤츠S크래스 승용차가 거리에 넘친다. 대가족이 쪽방 안에서 짐승처럼 우글대고 그마저 없는 가난뱅이는 거리와 들판을 떠도는데 소수는 하늘 닿는 빌딩과 초호화저택에서 수영을 즐긴다.
약자는 계속 빼앗기고 강자는 갈수록 더 군림하여 사회정의와 민족의 존엄은 사라지고 불의와 굴종의 검은 안개는 어둠처럼 덮어 누르고 있다.
매년 20억$나 된다는 미국의 원조는 다 어디로 갔나?
최류탄과 탱크는 누가 주었나? 반민생 반민주 반민족으로 일관한 친미 사대주의 정권의 말로가 눈앞이지만 늘 그래왔듯이 낙관할 수만은 없다.
왜냐면 이집트 민중의 주체역량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힘 있는 세력에 의한 쿠데타 말고는 이집트 민중의 항쟁으로 불의한 정권을 몰아낸 역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일강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한 카이로의 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서울의 봄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사람들 마음에도 머나먼 카이로의 봄소식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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