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시설이라 함은 기본법 제3조 제2호의 규정에 의한 철도시설을 말한다. 가. 철도의 선로(선로에 부대되는 시설을 포함), 역시설....
2011년 5월의 어느 날, [철도안전관리규정 제2조 정의]를 외우며 출근하는 나는 수도권 전철역에 근무하는 역무원이다. 아니, [역무원]이라 쓰고 [욕무원]이라 읽어야 한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마누라랑 싸우고 출근하는 길인지...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으며 욕을 해대는 손님한테 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회사도 나를 욕하며 규정을 외우란다. [제 규정을 불이행하고 억측과 타성에 젖은 업무취급을 하고 있어 인적오류에 의한 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던데, 고슴도치 새끼만도 못한, 욕먹는 게 일인 나는, 욕무원이다.
얼마전 일근역장이 발령온 후로 나는 최부역장, 봉역장, 이렇게 세 명이 근무한다. 현장직원은 나 하나라는 말이다. 앗, 오늘도 역장이 벌써부터 출근해 있다. 아무래도 오전 여덟시면 출근하는 모양이다. 혹시라도 내가 만약 관리자급이 된다면 정시출근 칼퇴근으로 널리 직원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몸소 실천하리라.
하루 업무의 시작은 [안전확보실천결의] 제창.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달랑 세 명이서 결의를 외치고 있노라면 뻘쭘하기 이만저만이 아니다. 역장을 마주본 채 두 명이 서기도 그렇고, 삼각대형으로 서기에도 뭔가... 각이 안 나온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의 제창을 마치고 난 후, 갑자기 봉역장이 가슴팍을 노려본다. 여직원 가슴을 왜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나 했더니.. 아차차! [더욱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녹색리본 다는 걸 깜빡했구나! 잽싸게 리본을 달고 [세계1등 국민철도를 위하여] 어깨띠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지나게 늘어뜨린다. 작년 여름, 어깨띠가 무겁고 덥고 흘러내리고 불편사항이 많다고 했더니 없애는 게 아니라 얇은 천으로 바뀌어 내려왔다. 얼마 전에는 형광녹색으로 된 게 새로 나왔다. 올해 혹서기에는 망사로 된 녹색 어깨띠가 나올 것 같아 은근히 기대되는 바이다.
띠리리리~ 앗. 비상게이트 벨이 울린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똥싸러 가야된다며 문을 열어달란다. 당황스럽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다. 시원하게 다녀오시라고 해야 하는 걸까? 머뭇머뭇하다 게이트를 열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서비스 모니터링 체크리스트 마지막 항목, “더 필요한 사항은 없으십니까? 고객님”을 빠뜨리고 말았구나!
정말 똥싸러 가는 손님일 수도 있고, [아이러브 CS 스테이션]이라며 역마다 돌아다니며 “친절하나 웃음하나 없다”고 지적질하는 본부 직원일수도 있고, 글로리 서비스 모니터링 요원일 수도 있고, CS 서포터 실적을 채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다른 소속 직원일 수도 있다. 항상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최부역장이 A4 문서를 다발로 들이민다. 안전확보긴급명령, 사고사례전파, 환경교육일지, 보건교육일지, 대테러교육일지에 서명을 하란다. 요즘엔 무슨 싸인을 이렇게 많이 하는지... 관리자 두 명에 직원은 나 하나지만, 웬만한 기업 간부가 부럽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멋진 싸인이나 만들어 놓을 걸... 하며 [사고사례]를 외운다. 얼마 전 옆 역 직원이 사고사례를 모르고 있다고 안전지도사에게 지적을 당했다.
싸인이 끝나자 최부역장이 또 A4 문서를 들이민다. 직무규정 학습시간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암기과목은 좀 취약했던 나는 지난 4월 평가시험에서 85점을 맞았다. 우리 역 직원 3명 중 3등, 본부 영업처 직원 683명 중 621등을 해 하위 10%에 해당되었고, 업무취약자-재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어 최부역장이 내 1:1 멘토가 되었다. 재교육대상자가 된 뒤로 최부역장이 영 까칠한 게 어째 좀 눈치가 많이 뵌다. MBC 위대한 탄생의 김태원 멘토는 항상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만 하던데...
어쨌건, 오늘은 [여객운송약관 제18조 반환]부터 시작한다. 우리역에 국철 단말기가 있어서 직접 열차표를 팔 때는 눈감고도 아는 것들이었는데, 국철 단말기가 철거되고 인원이 축소된 뒤로는... 하지 않는 업무다 보니 어째 감도 잘 안 오고 잘 외워지지도 않는 것만 같다. “춤을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광고가 있던가. 나는 업무를 글로 배운다. 아니, 요즘은 글 배우는 게 업무다. 그래도 어쩌랴. 이번 5월 시험에서도 업무취약자로 분류되면 인사 조치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손님에게 욕먹는” 내 본연의 업무를 시작해볼까 하는 찰나, 이번에는 봉역장이 잠시 보자고 한다. 젠장. 4월에 신청했던 사이버교육이 미수료된 걸 알았나보다. 1년에 4점을 이수해야 한다고 하더니, 언젠가부터 는 상반기 내에 4점을 이수하라고 한다. 4월에는 직무평가시험에 나오는 규정을 외우는 데 정신이 팔려 사이버교육 클릭 질하는 걸 잠시 잊어 미수료되고 말았던 거다.
봉역장이 사이버교육을 수료했냐고 묻는다. 잠시 머뭇거렸더니 그때 제출한 레포트를 제목만 바꿔서 [지식제안시스템-지식]에 올리라며 그 외에도 제안할 것이 있는지 잘 살펴 [제안]도 올리라고 한다. 이런저런 건의사항은 들은 체도 않으면서 왜 자꾸 제안을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알았다고 대답한다. 이때, 봉역장이 A4문서를 슬그머니 건넨다. 다음주에 [서비스인증제-비기너] 시험이 있는데 예상문제란다. 아, 또 시험을 통과하려면 외워야 하나 하고 있는데... 예상문제에서 다 나오니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며 봉역장 본인은 이번에 비기너의 상위단계인 [그린리본]을 준비하느라 [CS서포터]실적을 오늘 한 건 했다고 자랑한다.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사는 봉역장은 CS서포터 실적을 위해 아침 일찍 전철을 타고 다른 역에 원정을 다녀왔다고 한다.
<잠깐! CS서포터는 출퇴근을 하다가 고객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불편하거나 개선해야 할 사항을 이야기해주면 즉시 개선해서 고객만족을 기하자는 제도로서 그 시작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신종 파파라치로 변질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운 제도다. 본사 직원부터 1인당 할당량이 정해지자 “1201호 승무원이 검표를 안 하더라”는 고발이 시작됐다. 그린리본 자격요건에 CS서포터 3건 이상 실적이 포함되자 역직원들이 자기가 근무하는 역의 개선할 사항들을 마구잡이로 올리기 시작했다. 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자 담당자가 부하가 걸렸는지 “니네들 건 니네가 알아서 하라”며 실적에서 제외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실적을 채우기 위해 다른 역으로 원정을 나간다. 출근길에 지나던 역의 벽시계가 고장나 있으면 역무실에 들어가 이야기해주면 될 것을 인증샷을 찍고 자기 사무실에 가서 [CS서포터]에 올린다. “아침에 보니 모역 시계가 고장났더라구요!”라고.>
서비스인증제 비기너 예상문제를 받아들고 역장실을 나선다. A4종이에 적힌 글자를 너무 많이 봐서인지 괜히 어지럽다. 맞이방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라? 최부역장이 무슨 동영상을 보고 있는 거 아닌가. 이번 [글로리 안전 UCC 경진대회]에 출품할 동영상을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최신 스마트폰을 장만한 최부역장이 주연, 아들이 촬영한 동영상은 차두리의 “간 때문이야”를 패러디한 것으로 동영상 내내 최부역장이 삿대질을 하며 노래를 하고 있다. “너때문이야 너때문이야 사고는 너때문이야 규정 모르는 너때문이야”
최부역장은 이전 역에서 근무한 지 1년 만에 우리 역으로 발령 왔다. 3급 개인별 평가에서 하위 5%에 해당되자 출근시간만 2시간 반인 우리 역으로 새가 되어 날려 왔다. 그래서인지 최부역장은 요새 실적에 정신이 없다. 부역장이나 직원이나 역세권을 파악하기도 전에 반년 혹은 1년 만에 철새처럼 이리저리 날라 다니는 게 요새는 뭐, 일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맞이방으로 나선다. 물론, 어깨띠를 간지나게 두르고, 오줌싸서 쫓겨난 아이마냥 멍하니 서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부역장이 한손에 디카를 들고 맞이방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안내표지류 조사, 자전거 보관대 현황 보고를 해야 한다며 한참동안 사진을 찍고 다니더니 역환경개선실적을 보고해야 한다며 잠깐 와서 사진 좀 찍잔다. 빗자루질을 하는 모습 몇 컷 찍는다. 역무실로 들어가 어지럽혀진 책상 한 컷, 정리하고 있는 모습 한 컷, 깨끗해진 모습 한 컷 차례로 찍는다. 디지털카메라가 없었더라면 이 많은 사진 뽑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을까 싶다. 나날이 최부역장은 사진 컨셉을 잡는 데나 구도를 잡는 데나 일취월장하고 있다. 참! 난 오른쪽 얼굴보다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오는데... 다시 찍어달라고 할까?
“임자~!” 웬 할아버지가 툭툭 치며 부른다. 아줌마도 아니고 아가씨도 아니고 색시도 아니고 임자는 처음이다. 어쨌건, 기차표는 왜 안 파냔다. “네~ 고갱님~!”하며 설명을 시작하는데 ‘고갱님~’이 본인을 칭하는 건지 누구네집 아들 이름인지 분간도 못 하는 것 같고, 뭔 소린지 도통 못 알아들으시는 눈치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고갱님~!”하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이 분 또한 모니터링 요원일 지도 모른다. 순간, 환급기에서 동전이 안 나온다며 중학생이 나를 찾는다. 저쪽에서는 노인분이 게이트를 못 나오고 바둥바둥대고 있다. 일단 노인분을 구출하고, 환급기 열쇠를 가지러 역무실에 들어간다. 예전에 부역장은 일을 도와주기도 했는데, 요새 최부역장은 공문을 읽고, 파발마 메일을 읽고, 사진을 찍고, 공문을 만들고, 교육자료를 뽑고, 보고를 하고... 하루종일 마우스만 붙들고 앉아 있다. 봉역장은 찾아온 동네 노인회장님을 붙들고 앉아 글로리 회원에 가입하시라며 “글로리 운동은 국민적 애국운동”이라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흡사 독립투사다.
잠시 그룹웨어에 접속한다. 공문이 수십 개다. 파발마 메일함을 열어본다.
[전달]교육이수독려, [전달][전달]서비스모니터링, [전달][전달][전달]본부장님 순시
본부담당자가 직접 메일을 보내면 될 것을 관리역 역무과장도 [전달]하고, 서무도 [전달]하고, 봉역장도 [전달]하고, 최부역장도 [전달]한다. 같은 내용만 세네개다. 나는 욕먹는 게 일이고 그들은 [전달]이 일이다.
잽싸게 제목을 스캔하다 하나를 열어본다. 본부에서 글로리까페를 만들었으니 전직원이 가입하라는 내용이다. 앗. 어느새 최부역장이 등 뒤에 서서 얼른 가입하라는 눈치를 준다. 지금 가입할 건데 본부 까페도 가입하고, 본사에서 만든 까페도 있는데 그것도 가입할까요? 라며 예쁜 짓을 하려고 했더니, 웬걸, 그럴 필요는 없댄다. 까페 회원 수 늘리는 게 철도의 발전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담당자가 소속별 가입율까지 조사해 빨리 가입하라고 닦달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쨌건, 우리 본부 실적에 해당되는 것만 중요하다는 거다. 그게 바로 사회지도층의 윤리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가까워진다. 다시 맞이방으로 나서려는데 봉역장이 또 보잔다. 이번에도 A4종이를 내 앞으로 들이민다. 어? 이번엔 달랑 한 장짜리네 했더니... 사랑의 성금 가입신청서다. 우리 역에 [통큰봉사회]를 만들었단다. 아니, [글로리통큰봉사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 비용절감, 수익창출이 회자되더니, 요새는 뭐든 [안전]을 붙이고 [글로리]를 붙인다. 어쨌건, 글로리통큰봉사회에 가입하고 사랑의 성금 신청서도 작성하란다. 그리고 오늘 첫 활동으로 퇴근 후에 노숙자 배식 활동을 할 거니 같이 가자고 한다. 싸인을 하고 봉사활동에 가기로 한다. 퇴근하고 규정공부 해야 할 것 같지만, 오늘은 어째 피곤하기도 하지만, 관광열차 몇 명 모아오라는 것 보다는 훨씬 낳다 싶다.
맞이방. 거의 하루종일 서 있었더니 다리도 욱신거리고 허리도 좀 아픈 것 같다. 5월 시험이 걱정도 되고, 규정은 자꾸 머리 속에서 맴돌고,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모니터링 요원은 아닐까 신경쓰느라 머리도 좀 지끈거린다. 그럴 때면 그래, 가끔 천장을 보자! 천장에는 녹색으로 된 직사각형 구조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이렇게 쓰여 있다. “글로리운동은 국민적 애국운동입니다” “함께해요! GLORY!” 허리와 다리와 정신건강은 좀 해칠지라도 녹색이 시력보호에는 좋댄다.
(이 글은 가상의 글입니다)
글 : 권용희
퍼온 곳 : 그리움의 기억 간이역 http://photorai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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