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통기타가수 1세대 이장순을 보내며
-전라도닷컴, 남신희 기자
“고인은 가수였습니다.” 명징한 헌사였다. 또다른 수식어나 설명도 있을 것이되, 그 한마디 규정만으로도 그의 생애는 충분히 깊었다. 광주 통기타가수 1세대 이장순(1946∼2012)씨가 지난 3월16일 세상을 떴다. 향년 65세. 투병의 와중에도 그는 늘 ‘현역’이고자 했다. 광주 남구 양림동 사직골의 ‘생음악구락부 올댄뉴(Old & New)’에 붙여둔 그의 자기소개는 ‘올댄뉴를 운영하고 있는 현역 싱어송라이터.’ 과거에 축척했던 것들에 대한 미련도 과시도 없이 늘 현재형으로 음악을 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을 증명하는 말이었다.
<70년대 청년문화의 핵심 에너지, 통기타 음악과 통기타 문화는 그 시대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 동력은 풀잎의 소박함과 깡소주의 가난함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결코 빈곤하지 않았다. 그 가난들이 모여 화사했고, 풍성했고, 역사를 만들었다.…순수, 다양, 창조성의 그 위대한 정치적 가치. 지금 이 시대의 노래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장순이 그것을 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장순의 노래에는 정말 소중한, 내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모든 통기타들에게 갈망했던 ‘NOW’가 오롯이 들어 있는 것이다.> 2006년 구자형(작가·음악평론가)씨가 그의 음악 작업을 두고 했던 평이다.
1972년 광주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로 방송에 데뷔한 이래 그는 광주에 통기타음악을 뿌리내리는 역할을 했다. 음악다방이나 뮤직홀이 음악을 접하는 주요 창구가 되었던 그 시절 그는 가수이자 DJ로도 이름을 날렸다. 데뷔 초 그와 듀엣으로 활동하며 오랜 세월 지기였던 국소남씨에 따르면 70년대 중반 그가 활동했던 무대는 ‘프린스제과’‘또또와 음악감상실’‘투모로우’‘활주로’‘고장난 우주선’‘엠파이어’‘그랑나랑’ 등 부지기수였다.
고인을 배웅하는 안병철씨의 트럼펫 연주
시 낭송을 하는 한보리
이후 서울에 올라가 TV 프로그램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그 시절 그 쇼>의 방송작가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서울생활을 접고 광주에 다시 내려온 것은 2002년. 생애의 막바자에 그가 음악의 거처로 삼은 곳은 통기타 라이브카페들이 결집한 광주 양림동 사직골에 꾸린 ‘올댄뉴’였다. 이미 지난 2010년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뒤였지만 힘겨운 투병의 와중에도 ‘소외된 이웃과 암과 동행하는 환우들을 위한 작은 무대’를 열어 자신의 노래가 희망의 근거로 소용되길 바랐으며, 광주 포크음악의 역사를 짚는 광주문화재단의 기획공연 ‘산도 30년쯤 바라보아야 산이다’에 박문옥·정용주·한보리·김원중과 더불어 참여하기도 했다.
“광주 포크음악이 좀 까칠하다. 시대를 반영하는 데 결코 비겁하지 않았다”고 했던 그. <씨앗값 비료값 기계 빌린 값 농약값 적십자비 도장한 놈 수고비/ 알게 주고 몰래 뺏겨 뭐가 남겠니 그래도 산단다 흙에 묻혀서…> 시골쥐를 화자 삼아 농촌현실을 노래한 ‘들쥐’에서도 그 까칠함의 의미를 본다. 그는 <어렵게 꺼냈던 시골 얘기도 가사가 지루해서 끝낼 수밖에/ 어차피 레코드로 낼 수도 없고 그냥그냥 이렇게 부르고 산다>로 맺어지는 그 노래로 농촌현실에의 관심을 촉구했다.
가시는 길에 고인의 노래를 바치다
노래를 놓지 않고 살았던 그였기에, 먼 길 떠나는 배웅에 꽃보다 눈물보다 ‘노래’가 바쳐졌다. 지난 3월18일 오전 10시, 사직골 ‘생음악구락부 올댄뉴(Old & New)’ 앞에서 ‘광주 대중가수장’으로 치러진 노제. 통기타의 숨결이 남아 있는 거리, 그가 사랑했던 공간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려는 이들이 한데 모인 자리였다.
“가시는 길에 고인의 노래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인이 가장 즐거워할 것 같습니다.” 진행을 맡은 후배가수 김원중씨의 말에 이 노제를 꾸린 이들의 마음이 담겼다.
후배가수 기현수씨가 고인의 대표곡 '충장로의 밤'을 부르는 모습.
<밤비가 내리는 충장로의 밤은 깊은데/ 지난 날 이별이 내 가슴을 떨리게 하네/ 추억 속에 남아있는 아름다운 그 사람이/ 빗속에 멀어져 간 잊지못할 충장로의 밤/ 그리움 못잊어 나홀로 찾아 왔다가/ 쓸쓸히 돌아가는 이별의 충장로의 밤> 후배 기현수씨가 부른 노래는 고인의 대표곡 ‘충장로의 밤’. 이제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그 사람’은 이장순 자신이 되어버렸다. 안병철씨는 트럼펫 연주로 고인을 배웅했다. 트럼펫 소리는 군데군데 흐느끼고 쿨럭였다.
고인의 벗 이용완씨는 “이장순님은 이 거리를 사랑하고 가요를 사랑하고 광주를 사랑했다. 그의 광주사랑의 마음, 광주인의 마음을 깊이 새기고 싶다”고 말했다. 국소남씨는 “이장순이라는 그 이름을 음악을 사랑하는 광주의 후배들이 잊지 않고 기억을 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진행을 하는 동안 ‘고 이장순’을 몇 번이나 되뇌야 했던 김원중씨는 “고 이장순이라는 말이 참 낯섭니다. 결례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냥 장순이형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광주문화재단 박선정 사무처장은 “선배님은 포크음악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셨다. 통기타 한 대를 들고 방송국과 음악다방과 충장로를 누비며 광주에 진정한 음악인이 있다는 것을 최초로 전국에 알렸던 선구자이기도 했다. 고향을 잊지 않고 광주에 내려와서는 후배들의 음악적 좌표가 되었고, 잊혀져간 사직골의 통기타문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애쓰셨다”고 그의 생애를 기렸다.
가수이자 작곡자이자 시인인 박종화씨는 “노래가 삶이더니 삶이 노래더니 당신은 죽음도 삶도 노래”라며 추모시를 낭송했다. 아직 낭만과 격정이 살아있는 이곳 사직골에서 두 남자가 나누었던 생애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시 ‘가슴 따순 노래’. 새벽 2시, 꼬인 혓바닥과 허우적거리는 몸뚱아리로 사직골 언덕길 올라온 후배를 “…언제 약속했다고/ 아우 왔는가 가만 있어봐잉/ 자네는 맥주 안좋아하잖아/ 가만 있어봐잉 곧 끝낭께잉/ 마냥 즐거운 어린아이처럼 손 잡아주며” 근처 포장마차로 이끌던 장순이형을 그리워하는 시였다.
“저를 음악으로 이끄신 분이고 큰 나무 같았던 분”이라고 ‘장순이형’을 추억한 가수 한보리씨도 읊조리는 노래 같은 시로 그를 배웅했다. <형님 어제 처음인 듯 산수유가 피었더군요/ 마치 내겐 형님 웃음인 듯 했습니다/ 산수유꽃 피었으니 봄꽃들 차례로 피겠지요/ 세상은 그렇듯 피고지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형님 늘 웃으시더니 지금도 웃고 계시는군요/ 그래요 그 웃음 그대로 가셔요/ 그 웃음 저희들도 배우렵니다/ 형님의 노래 그 숱한 웃음이 세상을 물들였듯이/ 우리 노래 또한 불꽃처럼 세상을 물들여가지 않겠습니까/ 모두 다 형님의 노란 웃음 덕분이었습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뉘라서 즐거움만 노래하겠소 내 인생은 덜컹대는 빈 수레라오." '빈수레 인생'을 부르는 정용주 |
“뉘라서 즐거움만 노래하겠소” 정용주씨는 고인의 또다른 대표곡인 ‘빈수레 인생’을 고인의 유언 마냥 대신 불러주었다. <내가 지은 노래 속엔 꿈이 숨쉬고/ 내가 지은 노래 속엔 사랑이 있소/ 내가 지은 노래 속엔 한이 서렸고/ 내가 부르는 노랫 속엔 눈물도 있소/ (중략) / 뉘라서 즐거움만 노래하겠소 내 인생은 덜컹대는 빈 수레라오>
고인이 생전에 늘 안고 노래하던 기타를 물려받은 박문옥씨는 “음악하는 사람들, 영화도 없습니다. 무슨 대단한 스타도 아니고 돈을 많이 가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좀더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갔으면 합니다”라는 말로 고인이 남긴 뜻을 새겼다.
마지막 무대는 이 거리에서 통기타음악을 보듬고 살아가는 사직골 라이브카페 가수들이 꾸렸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그들이 선택한 노래는 ‘행복의 나라로’였고, 영정사진 속 그는 내내 웃고 있었다.
이날 사직골에 울려퍼진 노래와 마음들은 고인에게 바쳐졌으되, 산 자들에게 고인이 마지막으로 베푼 선물이기도 했다. 죽음 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지, 남겨야 할지를 말없이 일러주는.
‘당신이 사랑하며 살다간 자리. 그 뒤에서 사람 냄새가 피어오릅니다.’ ‘올댄뉴’의 벽에 누군가 붙여둔 쪽지에서도 그를 향한 그리움은 전해졌다.
‘Live is true, Life is oldies’.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말. 이제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그를 다시 볼 수는 없으되, ‘뉘라서 즐거움만 노래하겠소’라고 고단한 삶에 위로를 전해주던 그 목소리와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글 = 남신희 기자 사진 = 최명진 <사진작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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