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위하여

"진보정당 연대? 국민 삶 속에서 고민해야" [연속인터뷰<1>]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대지의 마음 2014. 10. 20. 10:59

장기간 끌어온 세월호특별법 제정은 여야 보수정당의 안일한 협상으로 심히 왜곡되었다. 철도-의료 민영화도 일방적으로 강행되고 있다. 대선시기 복지공약도 규제 완화란 이름의 신자유주의 처방으로 녹아나고 있다. 통일대박론이나 통일준비위 구성에도 남북관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일베'에 이어 카톡 사찰, 서북청년단(준)까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야권의 모습은 국민들의 낙담을 증폭하기에 충분하다. 당연히 의사파시즘에 대한 우려가 퍼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치세력의 형편은 어떠한가? 진보적 가치 실현과 당면 현안 대응에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으나 존재감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과거 상처로 인한 상호 불신으로 통합은커녕 연대연합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일반국민들은 물론이고 조직적으로 지지 지원했던 민주노총, 전농, 전여농 등의 조직대중에게도 깊은 실망과 좌절을 안긴 채 새로운 기대와 신뢰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이 진보정치의 재편통합이나 혁신 단결에 대한 내부 논의를 시작하고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도 연속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2013년 4월 혁신노동 혁신자주, 노동중심 진보통합의 기치로 출범한 전국정치단체 <새로하나>가 진보정치를 아끼는 각계 인사들, 진보정치에 몸담아온 정치인들과의 연속 인터뷰를 통해 ‘진보정치 : 성찰과 모색’에 대한 고견을 들어보았다.

아래는 그 첫 번째로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뷰는 9월 30일 오후 3시 옥수역 근처 카페에서 정성희 새로하나 집행위원(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이 진행했다. 



야권 재정비로 민주주의 출로 못 열면 매우 위험한 상황

정성희 소장 : 먼저 현 정세의 특징을 간략히 짚어주시지요.

김민웅 교수 :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임기 2년차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국가권력과 자본의 대동맹을 더더욱 견고히 하는 가운데 의사파시즘 또는 대중 파시즘이 보다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근현대사 왜곡과 분단체제의 적대 이데올로기까지 매우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우리사회의 의식 중추를 망가뜨려가고 있지요. 국가권력은 3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을 파괴하고 있는 중입니다. 보통사람들의 기본권이 박탈되어가는 중대한 위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일들은 민영화, 규제완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밀어붙이고 언론 장악, SNS 통제를 통한 언로의 봉쇄, 일베의 현실세력으로서의 등장, 심지어 카톡 사찰에 서북청년단 준비위가 등장하는 정도로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야권은 이에 비해 궤멸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실로 야권을 재정비해 민주주의의 출로를 열지 못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것입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도 사회당과 공산당이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와중에 노동운동이 깨져나가면서 히틀러의 나치즘을 불러왔지요. 진보정치세력의 결집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개의 진보정당이 하나의 집에 살 건지 따로 살면서 연대연합할 건지는 정세와 조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강력히 결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견지해야 합니다. 이 힘이 속히 복원되어 새로운 역량으로 진화해나가지 못하면 우리사회는 역사의 진보를 최전선에서 지켜나갈 수 있는 바탕을 잃고, 대단히 야만화되고 말 것입니다. 

정성희 소장 : 진보정치세력이 분열 갈등하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원인에 대해 총괄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김민웅 교수 : 진보정치는 신뢰를 잃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존재감 자체를 잃어버렸지요. 그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짚어야 하겠지만, 핵심적인 두 가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진보정치 존재감 상실, ‘민주주의’와 ‘정치’ 이해 부족 때문 

하나는 민주주의문제입니다. 

87년 이후 진보정치세력화 과정에서 놓친 주제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대단히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인데,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지속적인 동력 형성에 힘을 쏟지 못했어요. 마치 진보정치가 꽃을 피울 만큼 민주주의 조건이 이뤄졌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한완상 전 부총리도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성취되었다는 “87년 체제”라는 개념에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시던데,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토대를 구축해야 진보정치가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 이미 다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움직였기 때문에 진보정치를 뒷받침하는 힘이 약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진보세력 내부에는 민주주의문제에 대한 착각이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세력의 정치이데올로기쯤으로 치부하고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함께 이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일환, 위장이자 허구로 본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진행형이고 계속 심화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가면, 결국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권리까지 확장, 심화시켜가는 진보정치를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되거든요. 이는 대의제와 직접 민주주의의 요구를 단단하게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정치문제입니다. 

진보정치에서 현장운동도 중요하고 대중운동 확산이 당연히 요구됩니다. 그러나 대다수 대중들은 우선 상층의 정치를 주목합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현장의 정치가 이보다 덜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현장의 요구를 정책 결정과정에 담아낼 실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대중들이 주목한다는 뜻입니다. 상층결정구조에서 문제를 풀어낼 정치적 리더십의 향방을 결정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보정치는 이 점에서 매우 미숙했습니다. 진보정치가 보수세력이나 자유주의세력을 넘어설 수 있는 세련된 정치력을 발휘했으면, 한번 기대를 걸어 볼만하다는 대중의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런데 자기들 안에서의 작은 갈등도 해소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히 실망하게 되지요. 



운동은 올바른 투쟁, 정치는 책임지는 행동

한편, 진보정치의 실패를 운동권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운동권이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소명의식, 굴하지 않는 투쟁력은 소중한 자산이지요. 이를 놓친 진보정치란 한낱 제도 안의 굴복하는 정치를 하기가 쉽습니다. 오랜 세월 개인의 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역사적 사명을 갖고 투철하게 임해왔던 운동의 정신과 태도는 대단히 소중하고 빛나게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날 야권의 정치적 투쟁력이 무너진 것을 보면, 역사의 진보를 위해 자기 자신을 걸고 운동했던 동력을 포기한 결과입니다. 그건 초심이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운동은 주장을 앞세워 밀고 나가면 되지만, 정치는 역시 책임지는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류나 실패가 있으면 겸허하게 책임을 지고 제 때에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변명도 많이 했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어요. 언론과 여론의 탓도 많이 했고요. 이런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요. 언론이 진보정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건 상수입니다. 그 걸 뛰어넘을 수 있는 정치력을 보이지 못한 것이 진보정치에 대한 민중의 새로운 기대를 일으키지 못하는 핵심요인입니다. 아무런 권력도 없이 투쟁했던 운동의 시대 가졌던 투철한 자세와 책임정치의 역량을 결합시켜야 하는 것이죠. 

특히 진보정당에 대한 실망이 절망의 수준으로 추락한 계기는 통합진보당 사태입니다. 민주당에서 여러 차례 야권통합 추진이 있었지만, 진보정치세력은 그보다 못 미치는 모습을 보였잖아요. 자기들 내부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다면 국가적 차원의 갈등을 통합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겠구나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죠. 국민들의 이런 판단은 옳은 것이었지요.

그리고 진보정치에 거품도 있었어요. 실제 능력보다는 과도한 기대로 움직였는데 현실에서 정치를 하다 보니까 거품이 꺼진 것입니다. 진보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도 지키지 못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길고 뼈아픈 성찰의 과정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안철수 현상에 의존하려 했던 새정치민주연합도 이런 점에서 위기상황에 봉착해있지요. 내부의 자기 실력 없는 정치나 정당은 깨져나가기 마련입니다. 국가기관을 동원할 수 있다거나 권력을 배분해줄 수 있든지, 이해관계가 분명한 여당과는 다른 처지지요. 야권 전체, 정치 자체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진보정치도 새롭게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아야지요. 

정성희 소장 : 더 구체적으로 진보정치의 리더십, 정책, 이미지, 조직, 문화, 활동방식 등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스타정치인들을 정치적 리더십으로 만들지 못해 

김민웅 교수 : 첫째, 리더십 구축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중정치는 정당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가 관건입니다. 진보정치는 스타 정치인들을 배출했어요. 소중한 자원인데,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치인 자신과 정당 양쪽에 다 책임이 있습니다. 

진보정당 내부에는 당원과 대중이 주인이라며 스타 정치인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물론 이들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정당의 자산이기에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을 견제했던 것이지요. 그건 원칙상 옳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견제가 정치적 리더십까지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큰 문제였습니다. 정치적 리더십은 너무나 중요한 대중정치의 결정적 문제입니다. 

반대로 스타 정치인 본인들도 대중의 인기를 개인의 자산이 아니라 정당의 자산, 진보진영의 자산, 공동의 자산으로 넘겨 확대하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자신의 대중성을 과도히 믿고 개별적으로 각개 전투하는 식으로 움직이다가 조직과의 연계가 허약해지니까 당도 스타도 같이 무너지는 현실이 되고 말았지요. 양 측면 모두 깊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한 명의 정치적 리더 탄생도 아주 어려운 과정을 거칩니다. 그런 리더십이 한번 손상되면 복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일단 만들어지면 진보정치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함께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실 그런 노력이 부족했지요. 

민주노동당 시절에 당 지도부와 의원의 관계에 대한 중대한 논의가 있었지요.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시켜버렸지요. 의회민주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당이 의회에 파견한 것이다, 당이 모든 것을 지휘해야 한다, 겸직을 막지 않으면 당권의 독과점현상이 생긴다는 등의 걱정이었지요. 충분히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도 단계에 따라 다르게 펼쳐야 했던 겁니다. 당시는 진보정치 초기단계로 의원들이 당을 압도하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의원을 앞세워 당을 약진시키는 호기였는데, 교조적 판단을 한 것이죠. 당과 의회의 유기적 결합을 놓친 것입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당의 자산으로 넘길 수 있는 고리가 약해진 겁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당 내부에서 의원을 정치적 기득권으로 여기는 폐단이 생겼고, 이것이 당내 정파나 계파를 강화하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사태로 이어진 것입니다. 



내부정치 보다 현장과 의회를 연결하는 대의기능 강화해야 

결국 진보정치가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겪은 것입니다. 대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정치적 외피에 불과하다고 비판적으로 속으로는 인식하면서도, 그 대의민주주의의 대표가 되는 것이 어느새 진보정당의 기득권처럼 여겨지게 되고만 거죠. 그러면서 이 기득권을 둘러싸고 당 내부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즉 직접민주주의 요구가 정당의 프리즘을 통해 의회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분리된 것입니다. 이렇게 따로 놀게 되니까 진보정당이 현장 활동을 의회로 연결하는 고리역할 보다 당 내부 정치에 몰두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죠. 이것이 진보정치의 모든 것 인양 생각하고 정파나 계파의 알력이 생긴 겁니다. 정당이 현장과 의회를 연결하는 대의적 기능의 강화에 노력하지 않으면 반드시 생기는 병폐입니다. 진보정당이 비판해온 여야 보수정당과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인 것이지요. 신랄하게 말하자면, 정치로 먹고 살겠다는 식이 된 겁니다. 

물론 모든 당권 투쟁이 비판의 대상은 아닙니다. 당권투쟁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가치의 정치를 할 것인가,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현장의 요구와 의회 기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 어떤 이념과 역량을 갖춘 지도력을 세울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요. 그러나 당권투쟁이 그런 차원에서 진행되지 않았어요.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당권투쟁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잖아요?  

다시 강조하지만, 정당은 현실정치에서 존립하고 있는 만큼, 대중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가 요체입니다. 대중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정치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이기에 이를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노조나 농민회 등 현장의 여러 대중조직이 결합해 진보정당을 세우고 강화해왔는데, 이를 자연스럽게 당의 발전으로 연결하지 못한 거지요. 매시기 정세의 요구에 따라 일치된 모습으로 폭발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 제약조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수이고 현실 여건상 행동반경이 좁아 어쩔 수 없어’ 라고 합리화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덩치를 키우기 위해 통합을 추진했지만, 내부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더 곪아터지고 확산되었지요. 단순한 통합은 내부의 혁신을 간과하거나 은폐하는 부정적 효과도 있습니다. 다양한 목소리에 대한 정치적 폭력의 성격도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통합 또는 연대를 만드는데 섬세한 과정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정교한 정책으로 지지 획득은 착각, 기존정책 비판 강화해야

둘째, 정책 논의과정의 문제입니다. 진보진영이 정책논쟁으로 분열 갈등하는 건 한심한 일입니다. 진보적 정책은 실제 집행해봐야 더 명확해지고 실천구조를 갖지 않으면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사람과 돈이 필요하고, 조건과 상황에 따라 계속 수정되고 변경되는 겁니다. 그런데 턱도 없는 조건과 상황과 위치에서 미세한 차이를 갖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싸우는 모습은 정력과 시간의 낭비일 뿐 입니다.

진보정치에서 정책대안 제시도 중요하겠지만, 기존 정책 비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거기에 우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안에 대한 대중적 기대와 논쟁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진보정치에는 기본적인 정책대안은 다 있습니다. 각 진보정당의 정책에 큰 차이도 없어요. 정부여당의 기존 정책이 어떤 사람들에게 피해를 가져다주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대중이 이 건 아니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 이렇게 합시다 라고 대안을 제안하거나 대안논쟁의 불씨를 당기면 되는 겁니다.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놔라’는 지적에 따른 스트레스가 심해 정교한 정책이 마련되면 모든 게 풀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면 대안정당, 정책정당으로 신뢰를 받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엄청난 착각입니다. 그 바람에 별 차이도 없는 정책을 놓고 대단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기본은 돼있기 때문에 세력확대나 정권장악이 보다 더 중요해요. 노동 민생 민주 평화 생태 등 모든 영역의 기본 정책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지켜내고 특권을 철폐하며, 우리가 가진 자원과 역량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그리고 복지와 생태계의 생명력을 위해 쓰도록 하자는 기본 방침이 있잖아요. 적용 과정에서 수정, 유보, 폐기될 게 있지요. 그러나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되거나 집권을 해야 정책을 현실화하는 책임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어요. 

셋째, 당의 이미지와 문화에 있어서는. 진보정치 진보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존경 받아야 합니다. 민중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데 좀 후지다, 이렇게 보이면 안 되잖아요? 진보적 이념과 주장만이 아니라 일반민중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이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인문학적으로 풍부하고 문화적으로 깊이 있는 삶을 지향하고 있구나, 참 매력적이다’ 라는 느낌을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투쟁하기 바쁜데 그게 되나?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문화적으로 행복한 삶의 매력을 만들어내야 대중적 지지를 이끌 수 있어요. 다 바쁘게 삽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런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어, 생활이 어렵지만 저런 거라면 진보정치와 함께 할 수 있어’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매력을 풍기는데 신경 쓰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매력의 가치를 별로 소중히 생각 안 했어요. 인류의 문명과 역사가 오랜 기간 만들어왔던 소중한 문화적 성취를 함께 공유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진보정치의 목적과 과제의 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건 덜 중요하거나 고급 취향이거나 부르주아 문화의 산물로 인식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진보정치, 투쟁적이면서 지적이고 문화적이어야  

예를 들어, 대중적 예술인, 연예인, 지식인이 전폭적으로 진보정치와 결합하면 그 자체가 이미 승리입니다. 물론 권력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갖고 쉽게 참여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으나 진보정치의 문화활동이라면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지요. 몇몇 연예인, 예술인은 이미 하고 있어요. 그들과 호흡해 진보정치가 문화생활공동체를 꿈꿀 수 있다면 ‘저기에 한 표를 던지겠어’ 하는 대중의 바람이 생길 것입니다. 또 삶의 풍부한 내용을 꾸리고 만드는데 당원과 대중의 취미활동 지원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적인 측면을 지식인들의 역할로 한정해선 안 됩니다. 유럽,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진보정당이 세계적 역작들을 만들었어요. 저명한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년 6월 9일~2012년 10월 1일) 같은 사람도 영국 좌파정당의 산물이었지요. “레프트 북 클럽(Left Book Club)”의 회원으로서 지적 체계 구성을 책임지고 최고의 지적 산물을 낳거든요.

진보세력은 거리에서 떼쓰듯 시위만 한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요. 제도권 내의 정치나 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을 만들어 내는 과정입니다. 그와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은 한국사회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지적 성과물을 만들어내고 최고의 역량을 지닌 지식인들과 결합해, 당의 예산을 과감하게 투자해서라도 역사의 방향을 밝히는 수준 높은 지적 성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보정치를 쉽게 폄하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국제적 저작물이 되어 권위가 생기고 다른 나라의 진보운동, 진보정치에도 영향을 주는 데까지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는 비판 속에서 실천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 역시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의 문제는 가치에 대한 논쟁입니다. 진보정당 안에서도 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었어요. 냉전과 분단의 틀에 갇힌 비생산적 이념논쟁으로 실천적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그러나 이념, 사상, 가치논쟁은 한 사회에 우선되는 가치를 결정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 문제를 결정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거두어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를 정하는 겁니다. 

이를 위해 우선 가치를 정하는 치열한 과정이 요구되지요. 이를 삭제하고 제거하니까 진보정치만이 아니라 한국정치 전체가 황폐화된 것이죠. 그 논쟁 회피에 진보정치의 책임이 큽니다. 인류역사에 봐도 사상 이념 없는 정치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위대한 정치 철학과 사상은 그런 쟁투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진보정치 안에 지적 풍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뻔한 스토리의 이데올로기적 뼈대를 갖고 갈등하고 선택하는 것이지요. 진보정치는 지식의 최전선까지 밀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진보정당이나 진보적 지식인이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는 미래과학에 대해 발언합니까? 못하고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이지요.          



패권주의 극복, 당내 ‘숙의민주주의’ 정착으로  
      
정성희 소장 : 진보정당의 운영에서 다수 정파의 패권주의는 불가피한 것입니까? 단순히 다수와 소수의 당내 민주주의 문제가 아니라, 위상을 달리하는 정파조직이 진보적 대중정당의 단결과 발전을 위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요?  


김민웅 교수 : 앞서 말씀 드린 민주주의문제와 직결되어 있어요. 다수파와 소수파는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다수파가 패권주의를 행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민주적 논의와 절차를 제대로 거쳐야지요. 다수결의 원리가 제대로 실현되려면 숙의민주주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서로 충분히 소통하고 논의하고 깨닫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다수결로 결정해야 반론을 제기하기가 쉽지 않지요. 

숙의민주주의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에너지도 많이 요구되지요. 그러나 역사적으로 숙의민주주의를 잘 하면 그 과정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탄생합니다. 대중적 설득력을 가진, 치열한 논쟁의 능력이 생겨나는 겁니다. 한국정치에 문학적 수사, 역사적 전망, 언변 등을 두루 갖춘 탁월한 정치 연설가가 없어요. 올바른 정치선동은 진보정치의 책무입니다. 선동은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나, 사람들에게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열정을 갖도록 하는 선동능력은 정치를 진보하게 하는 절실한 역량입니다. 보수 정치인이기는 했으나 키케로가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이지요. 이러한 리더십을 배출하지 못한 이유도 숙의민주주의 과정의 훈련과 학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득력, 주장의 근거, 논리적 명징이 갖춰져야지 다수의 힘을 앞세운 폭거로 관철하려면 안 되지요. 다수의 횡포가 일상화, 구조화되면 패권주의로 갑니다. 다양한 과정의 리더십 형성이 실패하게 되지요. 패권주의는 다수의 독과점에 그치지 않고 진보정치가 지향하는 다양한 흐름의 근거를 박탈하지요. 물론 숙의민주주의는 ‘언제까지 논의를 계속 할 거야, 정당답게 기동력 있는 결정과 집행을 해야지, 라는 물음에 봉착합니다. 이런 때에도 쉽사리 도전하기 어려운 논리, 이론적 근거와 실례를 들어 논의하는 훈련을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패권주의가 발붙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정파조직, 혁신과 단결 위해 양보하고 헌신해야 

더구나 다수 정파조직이 수준과 실력도 못 갖춘 채, 한국변혁을 책임진다는 과도한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타 정파나 대중운동 출신의 정치역량을 배제하고 진보적 대중정당을 대상화하는 패권주의 행태를 보였던 것은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단순한 의견그룹이 아니라 변혁운동조직이라면, 그에 맞는 사상적 실천적 능력을 갖추고 대중정당의 운영원리를 존중하며 당의 발전을 위해 일했어야지요. 먼저 모범을 세우고 혁신과 단결을 위해 양보하고 헌신해야 했던 겁니다. 

정성희 소장 : 냉전수구세력의 종북 악선전은 상투적인 수법입니다만,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일부 진보세력의 어설프고 미숙한 태도가 빌미를 주어 격화시키는 측면은 없습니까? 진보정치의 종북 이미지에 대해 좀 더 엄밀하게 그 원인을 진단해주시지요.

김민웅 교수 : 과거에는 '친북' '빨갱이'라 했는데, 지금은 '종북'이라고 낙인찍지요. 진보진영 내부에서조차 '종북'이란 말을 쉽게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이 폭력적이고 위험천만한 낙인사용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종북' 논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먼저 인권을 중시한다는 진보세력이 북의 인권에 대해 침묵한다면 신뢰할 수 있을까라는 대중의 상식적인 질문이 있어요. 진보정치는 이에 대답을 해야 되는 겁니다. 북의 현실을 잘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말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했지만 이건 말이 좀 안 되지요. 탈북자들이 한 두 명도 아닌 상황에서 말이지요.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시원하게 얘기할 수 없는 여러 조건과 이유도 설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자를 얘기하지 않고 후자만 얘기하면 북을 옹호하는 것으로 인상 지워져요. 

이런 비판에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가 보기에는 북이 이런 문제가 있다, 이런 상태에서 통일이 되더라도 갈등과 고통이 따를 것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얘기하지 못했지요. 또한 "분단과 냉전 속에서 정부당국 간에도 상호 체제를 존중하기로 합의한 바 있는데, 공당으로서 향후 남북관계 회복을 위해 북을 내놓고 비판하기 어렵다, 사안이 생길 때마다 고뇌가 없는 게 아니다"라고 얘기했어야지요. 또 “남쪽이 살아온 방식이 있듯이, 북쪽이 살아온 방식이 있다, 혹시 그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잘 모르고 단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하지 않나” 라고 정직하게 얘기하면 많이 부분이 해소될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북한문제에 대한 침묵과 회피, ‘종북몰이’ 방어력 약화시켜

이런 식의 자세와 입장을 꾸준히 견지해왔으면 사회교육적 차원에서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냉전수구세력의 ‘종북’ 몰이도 어느 정도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결과, "안에서는 그렇게 시끄럽게 하더니 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네?"라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거지요. “종북”이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 격입니다. 

북의 핵 문제도 그래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과 선제공격전략이 가동되는 한, 북의 핵개발은 정당방위의 동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당방위는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에게만 반격이 이루어져야 실질적인 정당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핵은 모두에게 재앙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면 됩니다. 초기 북 핵실험에는 미국의 대북 압박이 북 핵을 초래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당방위로 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입장을 취했어야지요. 지금도 미국의 대북 안전과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을 전제로 북 핵 문제의 현실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라고 조건부 핵무기 폐기를 밝힌 나라는 북한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슬람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도가 중국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미국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핵무기를 포기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어요? 단 한 나라도 없습니다. 북한만 공식적으로 얘기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그걸 믿을 수 있어? 라는 반론이 나오겠으나 그건 그 다음 단계의 문제이고, 지금은 이 점을 최대한 활용해나가야 합니다. 

진보정치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런 차원의 얘기를 하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는 수세적 대응이나 옹호 일변도의 인상을 주었지요. 냉전수구세력이 종북으로 싸잡아 매도할 때 방어할 수 있는 내공을 쌓지 못했지요. 미숙한 대응이 아니라 생각 자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종북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냉전수구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보정치가 남북관계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정립하지 않았던 것에서 기인하는 거지요. 

지금은 이와 관련해서, 여론 지형상 밀리고 밀려서 궁지에 처해 있는 형편이지요. “너희들 북을 한번 욕해봐, 그러면 혹시 믿어줄지 알아?” 라는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일부 진보정치세력이 이제 와서 대북 비판이라도 하면, 그 비판의 진정성에 대한 의혹제기는 물론이고 “뭐야, 미국과 냉전수구세력의 대북 압박에 이용되는 거 아니야” 라는 또 다른 시비에 걸리지요. 당면 정세와 국민정서를 섬세하게 읽고 설득력 있는 논리로 무장하지 못한 진보정치의 실력에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상황에 대한 자신감, 정세에 맞는 방향 설정을 정확히 못하는 것이죠.



법률적 판단 보다 정치적 판단을 앞세워야 

그 다음에 미숙한 대응 문제인데요. 당원과 관련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진상 파악이 분명치 않은 상황에서 당원 보호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그로 인해 당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이때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당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당이 먼저 살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당이 살지 못하면 당원의 보호도, 명예회복도 어렵게 되는 경우 말이지요. 여기서 먼저 중요해지는 것은 대중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의 문제입니다. 단계 마다 대응도 다르겠지요. 어떤 때는 몸 전체를 살려내기 위해서 팔을 잘라내야 하지만, 어떤 때는 그 팔을 지키는 것이 몸을 살리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 그 판단을 제 때 정확히 해야지요. 진상을 밝히는 것도 필요하지만, 시간이 더 흐리기 전에 우선 대중의 요구에 기초한 당장의 조치를 취해야지요. 사과해야 할 때 진상논란부터 얘기하면 대중이 어떻게 보겠어요? 대중의 감정 해소가 되지 않지요. 억울해도 먼저 이렇게 하고 차분하게 진상과 함께 관련 당사자를 살려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겁니다. 통합 진보당 비례 후보 선거과정에서 불거진 부정선거 문제 해결은 이러한 점을 놓치고 말아 통합당 와해의 과정을 겪고 말았습니다. 

진보정당으로서 부끄럽게도 이런 부정선거 논란이 생긴 것 자체에 대해 먼저 진솔하게 사과하고 나중에 이러 저러한 문제도 있었노라고 얘기해야 대중들은 귀 기울입니다. 진보정치 활동가들이 대중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가령 길을 가다가 부딪혔는데 금방 정황을 모를 때 첫 번째 태도는 “아이구,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부터 하고 그 다음에 진상과 원인을 따지잖아요? 하물며 공당은 당연하지요. 상식의 문제 아닌가요? 물론 여기서 진상규명의 중대성을 간과하자는 것도 아니고, 권력이 관여된 진상규명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접근이 요구됩니다. 

사실 진보정당은 주장과 설명을 과도하게 하는 약점이 있어요. 진보운동, 진보정치가 가치논쟁, 이론논쟁, 법리논쟁의 관성으로 주장하고 설명하는 버릇이 있는 거지요. ‘또 저 얘기야’ 하는 대중의 따분함, 식상함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죠. 보수정당은 설명하지 않고 TV광고처럼 감성과 이미지 또는 핵심적인 단어로 다가가고 진보정당은 사사건건 설명하려고 해요. 내용 이전에 전략에서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주장과 설명 보다 소통과 공감의 방식으로 

대중정치는 자세한 설명 못지않게 핵심적 주장과 감정의 줄기를 잡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간단하게 압축해서 던지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저자나 출판인들이 책을 내면서 제목을 얼마나 고민합니까? 진보정치인들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말과 행동을 고민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법률적 판단보다 빠른 조치를 요구하는 정치적 판단이 필요할 때에는 이를 확고히 앞세워야지요.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깔끔하게 뒤로 물러나 마무리 짓는 결단을 보여주면 대중은 ‘아 멋있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뒤끝 있게 마무리 지으려 하면 수준 떨어지게 보입니다. 

정성희 소장 :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에 기초해 건설되고 이후 전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노점상연합회 등이 조직적으로 결합했지요. 지난 10여 년 진보정당과 대중운동조직의 관계에 대해 진단해주시지요.

김민웅 교수 : 제가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자격과 입장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진보정당은 노동조합, 농민회, 노점상연합회 등의 조직적 결합으로 사람과 돈과 조직이 뒷받침되었지요. 그러나 대중운동조직이 정치활동가, 대중정치인을 많이 배출하지도 못했고 진보정당은 이러한 대중정치역량의 양성도 수용도 배치도 제대로 못하고 오히려 정파조직 활동가들이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어내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정파조직이 대중정당을 대상화함으로써 대중조직의 정치적 진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가로막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진보정치의 분열이 현장에서 대중조직의 갈등으로 확산되고 이러한 결과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조직의 기대와 신뢰도 추락했습니다. 

진보정당이 잘못된 정파조직으로 인해 자신의 뿌리를 잊어버리고 정치적으로 자신의 모태가 된 대중조직을 배신한 것입니다. 물론 노동자, 농민, 교육운동 등 대중운동조직을 기반으로 진보정당이 건설되고 강화되었지만, 이들이 진보정당을 지배하는 것이 또한 옳은가 하는 논쟁은 남습니다. 진보정당 안에서 대중운동조직의 기득권화도 문제이지요. 정치조직은 정치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대중운동조직과 다른 조건에 있지요. 



대중조직의 정치역량 배출 부족, 정파조직의 그릇된 권력욕 

그런데 대중운동조직은 ‘몸 대고 돈 대서 키워놨더니 너희들 마음대로 해’ 라는 불만, 진보정당은 ‘그렇다고 당을 좌지우지하려 해’ 라는 불만은 당연히 생깁니다. 때문에 진보정당과 대중운동조직은 그 긴장을 해소하고 건전한 관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통해야 합니다. 지금 서로 모두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 있기에 새로운 모색의 기회인지도 모르지요. 그 소통의 매개자가 대중조직 출신의 정치활동가, 대중정치인들입니다. 이들의 양성, 배치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정파조직 활동가들의 헌신적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진보정당은 민중을 위한 민중 자신의 정당이니까요. 

여기에는 정치적 겸허함이 필요합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10명의 의원을 배출한 이후, 또 진보통합 이후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겸손과 양보를 잃고 제도권 진출을 과도하게 바라보면서 두 차례의 대형 사고를 내지 않았습니까? 어찌 보면 너무 성급한 목표와 대응을 해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잘 정리하고 성찰하면 길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갈등과 대립, 소통의 부족은 언제나 있게 마련인데, 정치력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요체이지요. 이를 문제가 아니라 과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성희 소장 : 진보정치는 실패했고 혁신통합도 불가능하기에 ‘새정치민주연합의 좌측으로 들어가자’, ‘현재의 진보정당들이 각개약진 후 장기적으로 통합하자’, ‘이제 진보정당은 포기하고 지역과 부문의 대중조직 강화에 매진하자’는 등의 여러 견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진보통합당이 필요한지, 가능한지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김민웅 교수 : 새정치민주연합도 상당히 위기입니다. 진보정치가 좌절되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잘 나가고 있으면, 그 안의 분파든 세력이든 들어가 대중적 외연을 확장하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런 조건도 아니잖아요? 그 집도 허물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디를 들어간단 말입니까?  

진보정치세력들 안에는 과거의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또 대중들이 2008년 2월 1차 분당 이후 보다 훨씬 더 실망과 좌절이 깊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은 분명히 시간이 걸립니다.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공학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문제를 극복하지도 못하고 대중의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어렵습니다.  

또 자본주의 모순, 신자유주의 폐해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분단 모순, 남북관계 평화통일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매우 척박합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정치는 여야를 넘어 한반도정치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것입니다. 국제정치상황도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한반도상황이 진보정치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줄 것입니다. 남과 북의 틀에서 큰 정치의 맥을 짚고 만들어 가는 노력이 절실해지고 있는 겁니다. 진보정치는 필요하면 보수정치와도 손을 잡는 큰 수를 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진보정치 연대연합으로 처음부터 겸허하게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단순히 국내선거를 통한 지지율 제고와 제도권 진출이 아니라 한반도정치라는 매우 중대한 과제에서 진보정치의 진가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진보정치의 혁신통합은 자체의 생존과 약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라는 차원에서 임해야 합니다. 문제의식의 순서를 잘 잡아야 하는 겁니다. 

크고 넓고 길게 보고 가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형태의 진보정당 재건, 대중과의 새로운 만남을 위한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원외정당으로라도 남을 각오를 하고 기초공사를 튼튼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의 문제, 분단의 문제, 환경의 문제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얽혀있는 문제 아닌가요? 진보정치세력들이 연대 연합하여 아주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대단히 겸허하게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세와 방식으로 해나가면 빠른 속도로 진보정치가 부활되고 강한 통합도 이뤄질 것으로 봅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유기적 관계를 맺고 몇 단계만 거치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공동 논의, 공동실천을 통해 상호 불신을 해소하고 대중적 신뢰를 회복하는 단계를 거쳤으면 좋겠습니다. 성급하게 통합을 추진할 일이 아닙니다. 아래로부터의 진보정치 실천연대를 축적하고 통합적 리더십을 발굴, 육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2016년 총선 앞두고 새로운 진보통합당이 건설되면 금상첨화이지요. 그러나 미리 진보통합이라는 목표와 시기를 설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대중들이 신뢰를 다시 보내면 그 때 진보통합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필연적으로 선거공학에 빠져 새로운 진보정치의 혁신내용을 갖추지 못합니다. 

진보정치의 논의 순서가 나라와 민중의 상황은 어떠한가, 현재 정치동향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진보정치의 처지가 어떤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혁신통합을 추진할 것인가의 순서로 논의하면 그건 진보세력만의 리그일 뿐입니다. 진보정치의 생존을 위주로 고민하면 대중들이 그건 너희들의 일일 뿐이야 라고 하지 않겠어요? 진보정치도 국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잖아요? 결국 중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국민들의 삶 속에서 진보정치의 혁신과 연대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