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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최후의 만찬 광경을 패러디한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인 ‘얼간이들의 만찬’. 샤를리 에브도 제공 |
[토요판] 뉴스분석, 왜?
목수정이 본 ‘샤를리 에브도’
한 프랑스 언론사를 겨냥한 테러의 여진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권력과 권위를 조롱했던 언론인들의 죽음은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특정 종교를 모독하는 풍자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청년들은 왜 프랑스 언론을 겨눈 테러리스트가 되었나’ 등 수많은 질문을 남겼다. 프랑스 현지에서 보내온 글들을 통해 이번 사건을 보는 다양한 관점과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첫회로 목수정 작가의 글을, 다음주에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글을 싣는다.
“누구도 그들만큼 대범한 용기를 갖지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는 모두 2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사건 발발 직후, 테러가 프랑스 내에서 일으키는 즉각적 반응과 먼 나라에서 이 사건을 흥미로운 외신으로 다루는 두가지 시선의 극적인 간극은 사흘 동안 파리 시내에 울려퍼졌던 총성만큼이나 심장을 아프게 하는 경험이었다. 한국 언론들이 이 사건에 대해 갖는 첫번째 의문은 ‘왜?’ 그들이 표적이 되었냐는 것이었다. 필시 거기엔 사연이 있을 터, 당연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언론들은 (적어도 사건 초기에는) ‘어떻게’ 그 사건이 발생하였고 진행되었으며, 거기에 프랑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만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나는 사건 직후 했던 한국의 몇 방송사 인터뷰에서 ‘왜’라는 질문을 줄기차게 마주쳐야 했다. 그것은 마치 강간을 목격한 사람에게 왜 그 여자가 하필 강간당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당혹스런 일이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찾아졌다. 이들이 이슬람교를 조롱한 죄였다. 샤를리 에브도는 여러번 이슬람교의 성인인 무함마드(마호메트)를 그들의 표지에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등장시키며 조롱했으니까. 그 그림을 보면, 누구도 샤를리 에브도의 불경스러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슬람교도의 분노를 이해하게 된다. 테러까지는 과했을지 모르지만, 샤를리 에브도가 상황을 자초했다는 말이 어렵지 않게 입에서 나올 수 있다. 한국의 많은 언론들은 샤를리 에브도의 ‘도를 넘어선’ 표현의 자유를 비난했고, 이것이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 혹은 제국주의적 근성이라 단정하였다. ‘나는 샤를리다’라고 선언하며 거리에 쏟아져 나와 샤를리 에브도를 옹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협박에 항의하는 이들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먼저 분노를 촉발한 자신들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오만에 냉소를 보내기도 했다.
바깥에서 어떤 시선을 보내건, 프랑스인에겐 ‘왜’라는 질문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사고뭉치가 될 것을 각오하고 태어난 샤를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들의 완고한 앙가주망에 대해서도 의심치 않고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숱한 소송을 치렀지만-르몽드에 따르면, 평균 6개월에 한번씩 새로운 소송을 치렀다-그들은 언제나 어둠을 사주하는 자들을 향해 머뭇거리지 않고 익살스런 펀치를 날려왔다는 사실, 그들의 주된 싸움의 대상이 정치권력과 종교이며, 이슬람뿐 아니라 교황도, 예수도, 예수의 아버지도 이들의 화살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휴머니티와 못 말리는 고집, 달인의 경지에 오른 매서운 정치 만평에 대해 모두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지난 1월11일 파리의 테러 항의 집회 때 많은 무슬림들이 참여했다. 이들이 들고 걷던 <샤를리 에브도>의 ‘극단주의자들에게 지친 무함마드’ 만평. “얼간이들에게 사랑받는 건 힘들어”라는 문구가 보인다. 샤를리 에브도 제공 |
“우리에겐 신도 군주도 없다”
이들은 날마다 살해 협박에 시달렸고, 결국 그 협박은 어느 날 현실이 되었다. 샤를리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프랑스 땅에 오래 발 딛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테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샤를리 에브도는 표현의 자유 최전선에 서서 언제나 이 나라 사법부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들이 1992년 재창간 이후 벌였던 48번의 소송에서, 법원은 39번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장 자주 이들과 법정에서 만났던 단체는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이었고, 그다음이 극우 가톨릭 단체로 14번, 이슬람교단과 만난 것은 단 1번이었다. 그들의 무기였던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 의무와 종교를 중상모략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와 겨루어야 했고, 프랑스 사법부는 훨씬 자주 표현의 자유 편에 서 주었다.
이들은 1970년 태어났다. 68혁명이 막 시민들의 삶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 건방진 생각들을 게릴라처럼 사회 전방위로 펼칠 무렵이며, 동시에 드골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의 수장이었으면서, 동시에 가부장적인 구 프랑스의 상징이었던 드골의 시대는 68의 맹랑한 짱돌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제 68이라는 아들은 부친 살해를 완성한다. 1960년, 웃음으로 권위를 분쇄하는 것을 시도하며 창간된 아라키리(Hara-Kiri)가 그들의 불경함을 허락하지 못한 드골에 의해 즉시 폐간되었다면, 1970년, 68이 무너뜨린 경계 위에 창간된 샤를리 에브도는 논란과 환호 속에 그 화려한 생을 시작했고, 제법 긴 생명을 유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역사 속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시기(1982~1991)는,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이 권좌에 오른 직후였다. 좌파가 거둔 승리는, 바로 다음해부터 미테랑이 그의 가면을 막 벗기 시작하면서 배반되고 있었지만, 민중들은 더는 권력자를 조롱하는 매체를 반기지 않았다. 10년이 지나, 이제 모두가 사회당에 속은 것이 명확해졌던 그 시점, 샤를리 에브도는 재창간된다. 샤를리 에브도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은 ‘우리에겐 신도 군주도 없다’(Ni dieu ni maitre)이다. 그들은 혁명 이후 왕의 목은 잘랐지만 교회의 십자가는 부러뜨리지 못한 혁명의 후예들이 무기로 품어왔던 반교권주의(anticlericalisme)의 가장 끈질긴 실천가였다.
지난 일요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블로그에 게재되었던 교수 4명의 편지는 자신들이 말한 “나는 샤를리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한다. “우리는 지식인이고 자유인이다. 우리는 신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배웠고, 권력과 그들이 탐하는 사악한 쾌락을 혐오할 것을 배웠다. 우리에게 지식 이외에 또다른 군주는 필요 없다. 샤를리 에브도는 우리를 웃게 해주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들만큼의 대범한 용기를 갖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가치를 함께 나누었다. 그 점에서 테러범들의 과녁은 우리에게도 겨눠진다. 그래서 우리는 샤를리다.” 자신이 샤를리임을 선언한 자들 가운데는 이들처럼 샤를리와 같은 생각을 나누었던 사람들도 있지만, 단지 이들이 샤를리의 신념을 지키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이 죽음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양심을 지키는 언론인들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샤를리라고 말한 사람들도 많았다.
샤를리 에브도는 종교를 인류의 가장 너절한 발명품으로 간주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생각과 “종교는 범인들에겐 진실로 보이고, 현자들에겐 거짓으로 보이며, 권력자들에겐 이용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세네카의 종교관 그대로였다. 물론 이들은 인종차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테러범들이 그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러 들어왔을 때 이들은 인종차별주의와 어떻게 싸울지를 논하고 있었고, 이들이 남긴 마지막 호에 조롱의 대상으로 초대된 주인공은 이슬람 혐오를 주제로 신간 소설을 발표한 작가 미셸 우엘베크였다.
샤를리는 1992년 재창간 이후
48번의 소송에서 39번 승소
극우정당 FN과 가장 많이 다퉈
다음으로 극우 가톨릭 단체 14번
이슬람교단과 만난 건 단 1번
종교를 너절한 발명품으로 간주
반교권주의의 끈질긴 실천가들
68혁명 직후 창간해 권력자 조롱
반기지 않던 1982~1991년 휴간
바로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 시절
정기구독자 밀려들어 소화할 수 없을 지경
지난 일요일, 150만명이 쏟아져 나온 파리 집회에는 무슬림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들의 손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지쳐버린 무함마드가 ‘멍청한 놈들의 사랑을 받는 건 힘들어’라고 푸념하고 있는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이 자주 들려 있었다. 프랑스에 사는 다수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샤를리 에브도에서 가장 정확한 그들의 대변인을 찾았던 것이다. ‘나는 샤를리다’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와 ‘나는 아흐메드다’의 아류를 낳으며 진화했다. 프랑스의 이슬람 인구는 이 세가지 슬로건 속 어딘가에 속해 있을 터이다. 아흐메드는 테러범들을 진압하다가 테러범의 손에 죽은 이슬람계 경찰이었다. 그는 공무원이 되어 공화국의 가치를 나누고 이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고자 했으나, 이 사회에 자기 자리를 찾는 데 실패한 이민자 청년들이 빠져든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에 희생되면서, 또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에 사는 이슬람교도의 딜레마를 대변한다.
샤를리 에브도의 살아남은 편집인들은 샤를리 에브도가 국가적 단합에 이용되는 상황을 불편해하고, 오히려 다양한 생각들이 표출되는 이 상황에 안도한다. 이번 수요일의 표지를 그린 만평가 뤼즈는 이렇게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지지하는 국가적 단합? 만장일치는 올랑드한테나 쓸모 있는 거지. 그건 마린 르펜(극우정당 대표)이나 좋아하는 거야. 우린 언제나 구석에 있던 소수였어. 죽은 우리 동료들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벌떡 일어나 욕을 했을걸.”
테러범들은 ‘우리가 샤를리 에브도를 죽였다’고 소리쳤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샤를리 에브도를 죽이려던 그들은 결국, 샤를리 에브도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정부는 그들에게 100만유로의 지원금을 즉각 약속했고, 정기구독 신청자가 전세계에서 밀려들어, 소화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300만부를 찍기로 했던 지난 수요일판 샤를리 에브도는 순식간에 동이 나서 결국 500만부로 계획이 변경된다. 이번 테러가 없었더라면, 샤를리 에브도는 결국 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창간 때부터 광고 없는 신문을 지향해 왔던 샤를리 에브도에 정기구독자는 신문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독자는 이제 3만명 수준으로 줄었고, 소송은 끊이지 않았다. 샤를리 에브도는 사실상 무관심과 냉소 속에서 그들의 마지막 촛불을 태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스타일에 식상해서,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문제 삼아 시끄럽게 하는 그들이 마땅찮아 샤를리를 떠나고 있었다. 이런 샤를리 에브도를 불멸의 시대정신으로 반전시킨 주역은 바로 그 테러범들이다. 그들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야만과 폭력으로 답을 구할 수 없다면 해답은 정반대 편에 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1일 열린 ‘공화국 행진’에 참석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부터),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말리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 정상회의 의장,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이 연대의 뜻으로 팔짱을 끼고 시위 행렬을 이끌고 있다. 파리/로이터 연합뉴스 |
올랑드는 이 테러를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해석해 내며, 내부의 단결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집회에 나선 150만 파리 시민들이, 어둠에 맞서 다시 웃음으로 저항할 것을, 광신도와 이슬람교를 혼동하지 않을 것을, 우리를 분열시키는 모든 것을 여기서 멈추고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자유를 함께 지켜갈 것을 말하는 동안, 올랑드는 자유를 탄압하고 공포를 즐겨 무기로 사용하는 독재자들까지 불러들여, 파리를 세계의 수도라고 선언하는 과대망상적인 코미디를 연출했다. 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단 200미터를 걷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동안, 150만의 시위대는 서로의 눈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포근한 시선과 환호를 나누었다. 총리 마뉘엘 발스가 잠재적 테러범들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둑을 간단히 무너뜨리며 테러와의 전쟁을 국회에서 선포하는 동안, 프랑스의 지성인들, 작가, 예술가들은 테러범들 역시 우리가 키운 아이들이며, 그들을 광적인 이슬람 극단주의의 수렁에 빠지도록 방치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알카에다는 사건 1주일 뒤, 자신들이 사주한 일이었음을 밝힌다. 샤를리 에브도가 말했던 것처럼 종교와 정치권력은 공포와 협박을 탁구공처럼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카페 첫인사 “아직도 샤를리 못 샀냐?”
파리/목수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