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위하여

[한겨레]‘10살 정당’ 시리자는 노동자·농민의 친구였다

대지의 마음 2015. 2. 10. 13:23




그리스 급진좌파 어떻게 집권했나

지난달 25일 늦은 오후, 그리스 수도 아테네 인근의 케라치니 항구. 에게해의 잔물결 위로 석양빛이 반짝였다. 이날 치러진 그리스 총선 투표가 막 마감된 참이었다. 26살 청년 스피로스 라파나키스는 극심한 경기 불황으로 문을 닫은 현대자동차 대리점의 셔터에 지친 몸을 기댄 채, 낮은 휘파람으로 ‘인터내셔널가’를 흥얼거렸다. 시리자(급진좌파연합)의 후보로 출마한 그는 이날도 온종일 선거구를 누볐다. 이날 밤, 시리자는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 라파나키스는 시리자 기관지 <새벽>의 기자에서 그리스 국회의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내가 그리스 국민이 쓴 역사의 일부가 돼 기쁘다”며 “우리(시리자)는 지켜야 할 막중한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바뀐 건 라파나키스의 신분만이 아니다. 그리스 집권당이 보수우파 신민주당에서 급진좌파 시리자로 바뀌었다. 2400억유로라는 막대한 구제금융 부채와 혹독한 긴축에 짓눌려온 그리스 국민들의 표정에도 변화의 기대감이 감돌았다. 시리자는 전체 300개 의석의 거의 절반인 149석을 차지했다. 대다수가 20~40대의 신세대 의원들이다.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불리던 알렉시스 치프라스(40·아래 사진) 총리는 연립정부를 구성한 직후부터 유럽연합과 구제금융 재협상을 위한 잰걸음을 내디뎠다. 1930년대 이후 유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급진좌파 정권이 유로존(유로화 통용 19개국)을 뒤흔들고 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반긴축·구제금융 재협상 공약과
40년 양당체제에 대한 염증이
‘변화’의 열망에 불붙였지만
밑바닥 ‘풀뿌리 민중연대’ 힘이
신생정당의 집권 끌어냈다

푸드뱅크 등 서민복지 앞장서고
연대캠페인 통해 시민운동과 결합
약자 목소리 직접 듣고 대안 만들어
70대 할머니도 7살 손자도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말해요”


시리자는 2004년 범좌파 선거연합으로 출발해 2012년에야 당원제 정당으로 탈바꿈한 신생 정당이다. 반면, 그리스 정치는 1974년 군부독재 시대가 끝난 뒤 최근까지 줄곧 보수우파 신민주당과 중도좌파 사회당(PASOK·파소크)이 번갈아 집권해왔다. 시리자는 어떻게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40년 동안 강고했던 양당 체제를 파탄낼 수 있었을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비참한 내핍 정책에 대한 무력감,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에 넌더리가 난 국민들이 ‘변화’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 체제와 긴축에 대한 거부감이 곧장 소수 야당의 지지율과 득표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시리자가 출범 직후인 2004년 총선에서 얻은 득표율은 3.3%에 불과했다. 치프라스가 공언해온 ‘구제금융 재협상’과 ‘국가부채 탕감’도 뜻은 명징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시리자의 잠재력은 철저히 밑바닥부터 다져온 ‘풀뿌리 민중연대’였다. 시리자는 지난 10년간 꾸준히 농민·노동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궁핍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합리적 대안을 제시했다. 양당 체제에서 소수 좌파정당이 겪는 불리함을 부지런함과 헌신성으로 극복했다. 영국 준공영방송 <채널4>의 폴 메이슨 경제부문 에디터는 ‘젊음, 진실성, 일상성’ 세 가지를 시리자의 핵심 자질로 꼽았다. 메이슨은 <가디언> 기고에서 “이번 총선에서 시리자의 후보들은 젊고 세련된 외모와 행동으로 보수 정당의 장년층 후보들과 대조됐다”고 전했다. 그는 그리스 총선을 앞두고 22일 동안 그리스의 다큐멘터리 작가와 함께 시리자를 집중 취재한 ‘그리스: 긴축의 끝?’이라는 다큐멘터리를 공동제작해 방영을 앞두고 있다.

다큐 제작팀은, 시리자가 푸드뱅크에 줄을 선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농민들을 설득해 먹을거리를 확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항만노조에선 시리자 후보가 중국 기업에 소유권이 넘어갈 위기에 놓인 항만 시설의 현실을 성토하면서 낡은 이론에 매인 공산당의 경쟁 후보를 압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시리자는 부패한 정치 엘리트 집단에 맞서 젊고 세련된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스 중남부의 도시인 코린토스는 신민주당과 사회당의 ‘(정치적) 성채’라고 불릴 만큼 소수 정당들이 발붙이기 힘든 곳이었다. 2008년 경제위기와 2010년 구제금융 이후 이 지역은 포도농장과 레몬농장의 3분의 2가 은행에 저당 잡혔다. 농민들은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내야 했다. 은행들은 가차 없이 담보 토지를 압류했다. 농민들의 자살이 급증했다.

56살의 포도농인 야니스 초그카스는 다큐 제작팀에 “(전) 정부는 우리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협약(복지 삭감과 구조조정)으로 몰아넣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곤 우파 정부에 순종한 게 전부였다”고 한탄했다.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를 지켜줄 누군가를 좌파 진영에서 찾으려 했고, 시리자에서 수호자를 찾아냈다.”

이번 총선에서 시리자 의원으로 당선한 테오파니스 쿠렘베스는 ‘마을이 붉은색(시리자의 깃발 색깔)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단지 수사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린 나가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들이 뭔가를 말하면 우린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도움을 청할 때 우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장을 찾아다닐 때 파소크(사회당)나 신민주당 사람들은 본 적이 없어요.” 한 농부는 다큐 제작팀에 “당신들 언론인은 (총선 뒤에야) 우리를 인터뷰하러 몰려오지만, 시리자는 한결같이 그렇게 해온 유일한 정당”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와서 말을 걸었다오. 만일 우리가 주류 정당과 대화하길 원했다면 그들을 찾을 수나 있었겠소?”

시리자는 2013년 봄부터 ‘연대 클럽’이라는 서민 복지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애초 영양부족 상태의 취학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푸드뱅크 사업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금세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됐다. 그런데 방식이 독특하다. 필요한 먹거리는 ‘시혜’가 아니라 ‘나눔’으로 마련한다. 시리자 당원들은 농부들에게 정중하지만 확신에 찬 태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한 봉지의 감자를 나누는 것은 사회적 의무”라고 설득했다. 푸드뱅크 담당자는 다큐 제작팀에 “이건 (가진 자가 베푸는) ‘자선’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린 한 지역에서 120가구를 지원하는데,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소외, 정신 건강, 수치심(등의 치유)에 관한 것들입니다.”

연대 클럽은 몇달 전부터는 서민들을 위한 의약품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는 현재 전체 인구의 30%가 국민의료보험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 한 자원봉사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어 의사를 찾지 못하고 의료보건 시스템에 접근하지 못하는 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시리자는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고 몸이 아파도 입을 앙다물고 서러움을 참아온 몰락한 중산층에게 인간의 존엄을 되돌려주는 유일한 집단이었다.

폴 메이슨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작은 방에 함께 앉아 그들이 자살(의 위기)에서 빠져나오도록 대화하는 것보다 더 ‘미세한 정치’는 없다”며 “그럼으로써 무너지기 어려운 (시리자에 대한) 신뢰가 구축됐다”고 평가했다. 평생을 보수 정당을 지지해왔다는 아테네 시민 마리아(78)는 이번 총선에서 생애 처음으로 좌파 정당 시리자를 찍었다. “지금까지 우리를 통치해온 어느 정당에도 믿음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데 최소한 시리자는 달라 보인다우.” 할머니는 “일곱살짜리 손자도 제 엄마에게 ‘엄마, 치프라스를 찍어요.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해요’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시리자의 풀뿌리 운동은 그리스의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조직한 ‘그리스 연대 캠페인’의 활동과도 잘 맞물렸다. 2012년 총선에서 당선한 시리자 의원 71명 모두는 매달 급여의 20%를 이 조직의 ‘모두를 위한 연대’ 운동의 기금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과 시민운동이 밀접하게 결합한 새로운 연대 모델은 채권단이 그리스에 강요한 ‘과도한 긴축’으로 망가진 복지 시스템을 대체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시민들은 법률 자문, 보건의료, 무료급식, 교육 지원, 신선식품 직거래 중개 등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은 철저히 시리자를 외면하고 견제했다. 메이슨은 “그리스의 모든 민영방송과 대다수 신문이 시리자에 적대적이었고, 우파 진영은 시리자가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뒤처지길 바랐다”고 전했다. 현재 영어판 서비스를 제공하는 몇몇 그리스 언론들의 웹사이트를 보면 치프라스 정부의 ‘반긴축’ 협상이 최대의 관심사다. 긴축 반대, 불황 탈출의 목소리가 단연 대세다. 그러나 과거 시리자의 ‘연대 운동’에 관한 보도는 좀체 검색되지 않는다.

그리스의 뉴스 포털 통신사인 <그리크 리포터>는 지난주 “그리스 총선에서 ‘예스맨’ 정부가 물러나면서 그리스는 다시 ‘아니오’라고 말할 기회를 갖게 됐으며, 이는 우리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매체는 “이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 지도자(치프라스 총리)의 무례함을 응징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스 부채의 부담을 떠안지 않으려는 독일 국민의 불만을 의식해야 하고, 그리스와 ‘반긴축 연대’를 하려는 다른 채무국들에도 미리 본보기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에 대한 채권단의 ‘응징’ 수단은 두 가지를 예상해볼 수 있다. 독일이 유럽중앙은행을 압박해 그리스 은행들에 대한 긴급 유동성 지원을 차단하는 것과, 2016년 9월까지 계속될 1조1000억유로 규모의 ‘유로화 양적완화 프로그램’에서 그리스를 배제하는 방법이다. 어느 쪽이든 그리스는 경제회생에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시리자는 소수 야당 시절 낮은 곳으로 파고들어가 민심을 사로잡았다. 이제 그리스를 책임진 시리자 정부가 엄격한 채권국 독일과 유럽연합도 설득할 수 있을까.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4일 유럽연합 채권단과 만나 “서로 받아들일 수 있고 실행가능한 부채상환 합의”를 거듭 촉구했다. 앞서 지난달 말 시리자 정부는 내각을 구성하면서 ‘투명성부’(Ministry for Transparency)를 장관급 독립부처로 신설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는 구제금융 채권단이 그리스 경제의 회복에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해온 조세 회피와 부패를 근절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스는 현재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로존의 몇몇 회원국들로부터 구제금융 재협상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시엔엔>(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불황의 한복판에 있는 나라를 계속 쥐어짜기만 해선 안 된다”고 거들었다.

아직까지 독일은 그리스의 절박한 요구와 주변국의 은근한 압박에도 요지부동이다. 그리스와 유로존의 운명을 건 게임이 이제 막 시작됐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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