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도의 매뉴얼 준수 문화를 생각하다.
(주)몽골철도노조에서 매뉴얼 준수 문화와 관련해 우리들의 고민을 듣고 싶다고 해서 작성.(2017년 4월 5일)
방한 당시 나눈 이야기에 이어서 작성된 글이라 아래 글만으로는 이해가 덜 되는 부분도 있음.
한국철도의 4대 안전문화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글을 향후에 제출할 계획.
한국 사회는 급속한 발전을 해왔다. 국가가 마련한 정책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집행한 결과이다. ‘안전’보다는 ‘성장’이 중요했다. 사회 전반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시와 지침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전 활동도 경영자의 지시로 가능하고, 심지어 안전문화도 지시하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인식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해진 법령과 규칙, 매뉴얼 준수에 집착하는 문화이다. 규정과 매뉴얼을 지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궁금할 것이다. 매뉴얼 준수에 집착함으로서 발생한 문제를 하나씩 살펴보겠다.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대응을 방해한다.
우선,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생각과 행동을 막아 작업자를 피동적인 주체로 전락시킨다. 한국에서 현장 작업자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매뉴얼로 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매뉴얼 의존이 더욱 더 매뉴얼화를 부르게 된다. 결국 유연하고 창의적인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평상시 작업은 표준화된 순서가 갖춰져 있고 작업자도 작업절차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상 상태에 관한 절차는 과거에 경험한 적이 있는 사고에만 유효한 내용으로 정해져 있다. 이렇듯 매뉴얼은 발생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매뉴얼의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JR 동일본의 사례가 참고가 될 것이다.
지난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에 발생한 쓰나미와 원전 사고 당시, JR 동노조에서는 단 한 건의 인명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자연재해는 매뉴얼이 상정한 한계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JR 동노조 조합원들은 매뉴얼이 정한 조치 이상의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거나, 정해진 매뉴얼을 어김으로서 안전을 확보했다. 즉, 매뉴얼이 담을 수 없었던 위험 앞에서 유연하고 창의적인 대응으로 안전을 확보한 것이다.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사고의 배후원인을 덮고 책임자만 찾게 된다.
둘째,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사고의 진정한 원인을 찾을 수 없도록 하고, 책임질 작업자만 찾게 된다. 매뉴얼 준수에만 집착하면, 지켰는가 지키지 않았는가 하는 결론에만 빠지기 쉽다. 흔히 사고가 발생하면 대부분은 인적오류로 판단한다. 매뉴얼 준수의 주체가 사람이므로 매뉴얼 준수 여부가 사고의 주요한 원인으로 취급될 것이다.
하지만 (매뉴얼 준수 또는 미준수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인적오류는 사고의 ‘원인’이 아닌 ‘결과’라 할 수 있다. 인적오류는 작업 현장이나 조직의 여러 가지 배후 요인에 의해 형성되고 촉발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매뉴얼 준수라는 결과에만 집착해 사고의 진정한 원인을 찾지 못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상호 소통과 협력을 방해한다.
셋째, 잘못된 매뉴얼 준수 문화는 상호 소통과 협력을 방해하고 정보 공유, 보고 문화 등 좋은 안전문화 형성을 방해한다. 매뉴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점점 더 구체적인 매뉴얼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담기지 않으면 노동자의 책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철도는 상호보완적인 여러 복잡한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운영된다. 명확한 업무 구분도 필요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특히, 긴급 상황에서- 작업자들의 상호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너와 나의 책임 영역을 나누는 것은 결국 서로간의 협력을 방해하게 한다. 불신이 팽배한 현장에 안전이 깃들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매뉴얼을 잘 준수하면서 위에서 서술한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고민하고 있는 몇 가지를 공유하겠다.
◾노동자들의 참여와 이해가 중요하다.
첫째, 규정과 지침, 매뉴얼을 만드는 데 노동자들의 참여가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참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규정, 지침, 매뉴얼 등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신뢰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자 스스로를 위해서 만들어진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들은 경영자가 공표할 뿐인 선언이나 관리자의 실적을 위한 귀찮은 것,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새로운 규정을 만든다고 여길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인식으로는 진심으로 규정을 지키게 하거나, 규정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노동자들은 규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벌칙을 받지 않기 위해서만 눈속임 하려 들 것이다.
◾매뉴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매뉴얼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가진 매뉴얼은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다. 현장의 오랜 노하우가 축적되어 온 성과물이 문구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현장 경험이 풍부한 숙련노동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역사적 노하우 전체를 매뉴얼에 담고 있는지는 의문이 들 것이다.
즉, 매뉴얼은 세상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규정할 수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지난 2016년 한국의 안전처장관은 ‘매뉴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맞는 말이다. 특히, 예상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도시화로 인한 사고 등 상상할 수 없는 사고가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지금 과거의 매뉴얼만으로는 부족하다. 매뉴얼의 취지와 동기를 제대로 인식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매뉴얼을 넘어서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대응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안전문화를 함께 살펴야 한다.
셋째, 문화적 측면에서 매뉴얼 준수를 위한 기초를 형성해야 한다. 매뉴얼을 제정하고 배포하고 감시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안전문화를 어떻게 형성하는가이다. 현장 노동자의 높은 책임감, 자긍심, 상호 신뢰와 협력의 문화가 높아 갈수록 현장 활동의 기본인 매뉴얼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한국 철도의 경우에는 선언적인 경영자의 방침으로 ‘지키는 문화’를 표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접근이다. 문화는 관리자가 공표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뉴얼 준수 여부만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럽과 일본 JR 동일본이 오랜 역사적 실천 속에서도 여전히 고민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스위스와 노르웨이의 안전문화와 매뉴얼 준수를 위한 철학을 적극적으로 배울 것을 추천한다. 문서화된 자료보다는 실제 방문을 통해 그들의 문화와 철학을 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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