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월의 햇살을 받으며, 그리고 말없는 묘석들을 바라보며 묘지의 담길을 따라 ‘꼬뮌 전사들의 벽’ 앞에 닿았다. 허름한 벽에 ‘꼬뮌의 죽은 이들에게’라고 쓰여 있는 비석이 붙어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초라한 비석이다. 벽 앞에는 순례자가 없었다. 그래도 벽 밑에는 빨간 장미꽃 다발이 많이 쌓여 있었고, 벽 틈에도 장미꽃이 꽂혀 있었다. ......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더 전인 1871년 5월 28일 뻬르 라셰즈에서 최후까지 항전을 했던 147명의 ‘꼬뮌 전사’들이 바로 그 벽 앞에서 총살당했다. ...... 이로써 ‘역사적 대희망’이었다고들 하는 ‘파리 꼬뮌’은 막을 내렸다.”
홍세화,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에서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 당시.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에 의한 1871년 5월 21일 부터 28일까지 ‘피의 1주일’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파리 최대의 묘지 구역인 '페르 라세즈 묘지'의 한쪽 끝에는 코뮌파 국민병들이 총살당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장소는 '파리코뮌 병사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871년 5월 21일 일요일. 파리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이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게 된 튈르리 궁전 정원에 모여 콘서트를 감상하고 있었다. 코뮈나르(코뮌 지지자) 전사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음악회였다.
이 틈을 타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미리 심어놓은 스파이로부터 생클루 문 인근에 수비대가 없다는 하얀 손수건 신호를 받은 베르사유군은 일차 선발부대를 보내 일대를 장악했다.
긴박한 소식이 코뮌 평의회에 도착하자 평의원들은 서둘러 산회한 뒤 방위 태세를 갖추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클뤼즈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전쟁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밤이 되면서 시내에 들이닥친 정부군 본대 2만 명은 눈에 띄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파리코뮌의 마지막 ‘피의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망자 수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5만 명까지…. 10만여 명이 체포돼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됐다. 일부는 식민지인 태평양의 누벨칼레도니로 종신 유배됐다.
이들은 혁명가, 정치가로선 뛰어났는지 모르지만 훌륭한 군인은 아니었다. 절망 속에서 일부는 ‘기품 있는 죽음’을 선택했다. 실크햇에 연미복 차림으로 바리케이드 위에 올라가 베르사유군의 일제 사격을 받고 홀연히 연기 속으로 사라진 들레클뤼즈처럼….
레닌이 훗날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가한 파리코뮌은 태어난 지 72일 만에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사라졌다.
○ 파리코뮌 :
1871년 3월 28일부터 5월 28일 사이에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
1870년 7월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독일의 비스마르크 재상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이었다. 처음부터 프로이센 육군이 프랑스를 제압하였고 나폴레옹 3세를 9월 2일 포로로 삼았다. 파리 시민들의 농성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 28일 알사스-로렌 지방을 양도하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라는 프로이센의 요구를 받이들이는 대가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2월 12일 강화조약을 토의할 국민의회가 보르도에 설치되고 임시행정장관에 L.A.티에르가 임명되었다.
국민의회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비준했으나 파리 시민은 오히려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3월 1일 파리에 입성한 프로이센군은 파리 시민의 무언의 적의와 소극적 저항을 받으면서 3일 후에 철수하였다. 3월 18일 티에르의 임시정부는 정규군에게 농성 중 국민군(의용병)이 사용한 대포를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시민과의 마찰이 생겼으나 곧 정규군과 국민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19일 양자의 대표는 시청을 점거하고 ‘중앙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동시에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피하였다.
중앙위원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코뮌(인민의회)의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중앙위원회는 그때까지의 잠정기관임을 분명히 하였다. 26일 선거를 마치고 28일 시청 앞 광장에 20만의 시민을 동원하여 코뮌 성립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29일 집행위원회 아래 군사 ·재정 ·식량 ·노동 ·교환 ·교육 ·외교 ·사법 ·보안의 9위원회가 성립되고 시민생활의 자주관리체계가 정비되었다. 90명의 코뮌의원의 성분은 자유직업자 ·중산시민이 대부분이고 노동자는 20명이었다.
민중의 투쟁이 만들어낸 반란 정부로서 파리코뮌은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 등 너무나도 다양한 지향점을 가진 혁명가들로 들끓었다. 혁명독재 정부를 수립하려는 블랑키파, 자코뱅파 같은 다수파와 자율적 코뮌연합을 지향하는 인터내셔널 소속 소수파가 사사건건 대립했다.
코뮌은 짧은 기간에 징병제와 상비군 폐지 및 인민에 의한 국민군 설치, 집세 미지불분의 일시 연기, 관리봉급의 최고액 결정, 종교 ·재산의 국유화, 공장주가 방기(放棄)한 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관리, 부채의 지불유예와 이자폐기, 노동자의 최저생활보장 등 여러 가지 정책과 법령을 발표하였다.
코뮌이 지상 최초의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려고 분주한 틈에 프로이센과 결탁한 정부군은 5월 21일 맥마흔의 지휘하에 파리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피의 1주일’이란 7일간의 시가전 끝인 28일 코뮌은 붕괴되고 3만의 시민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거나 유형당하였다. 그리고 4만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만여명이 사형, 무기징역 및 그 밖에 유죄선고를 받았다.
파리 코뮌은 이후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 사회를 탐색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 누구보다도 파리 코뮌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칼 맑스와 그를 계승한 레닌이었다. 이 두 사람은 파리 코뮌을 통해 미래 사회로의 이행을 보장할 혁명 권력의 원형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그 핵심은 기존 권력을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저히 분쇄한 조건에서 아래로부터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칼 맑스는 코뮌을 '그 안에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완수하기 위해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 라고 평가하고, 맑스, 레닌주의자는 코뮌을 러시아 혁명에 선행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혁명정부로 규정하였다. 한편 소수파의 흐름을 잇는 무정부주의자는 코뮌을 '국가의 부정' 으로 이해하였다.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실증주의적 역사학계에서는 코뮌의 애국주의와 민주주의를 강조, 그것이 제3공화정 확립에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코뮌의 민중혁명으로서의 의미를 강조, 부르주아집단 국가를 아래로부터 해체하고 시정 완전자치권을 기초로 하는 자유로운 분권적 연합사회를 창출하려 한 현대적 의의를 새로이 묻는 H.르페브르들의 학설 및 파리 변두리 지역으로 밀려나 노동자 대중이 본래의 파리인 도심부를 탈환함으로써 소외되었던 시민사회의 부르주아 국가로부터의 자기 회복을 실현하려 한 의미를 재평가하는 J.르쥘리의 학설 등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다양한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파리 코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이 두 달 이상 한 국가의 수도를 장악하고 통치했다는 점에서 계급투쟁의 종착점이 어디인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려면 어떤 조건을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그런 점에서 파리 코뮌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관계없이 전세계 노동자들의 뇌리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피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파리코뮌에서 시행된 해방적 조치들
- 집세 지불 정지령 제정(3월 30일)
- 교회와 국가의 분리령 제정(4월 2일)
- 인질의 인도주의적 처분에 관한 법령 제정(4월 6일)
- 각 구에 여성노동자를 위한 협동작업장 개설(4월 10일)
- 집세 지불에 관한 법령 제정(4월 12일)
- 경영자가 버려둔 공장시설 접수령 제정(4월 16일)
- 상업어음 지불기한에 관한 법령 제정(4월 18일)
- 노동자에 대한 벌금, 임금공제 금지령 제정(4월 27일)
- 제빵노동자의 야간노동 금지령 제정(4월 28일)
- 정치적, 직업적 선서의 폐지 조치 시행(5월 2일)
- 관리의 겸직에 대한 이중수당 금지령 제정(5월 4일)
- 국민방위대 가족들에 대한 생활보상 대책 마련 및 내연관계의 처자 차별 철폐(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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