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몇 개의 포스팅을 내가 근무하는 철도 현장의 안전문제로 채웠다.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여과없이 털어놓은 만큼 보기에 따라서는 철도 안전에 대한 근본 회의를 갖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철도 현장의 안전 수준은 우리 사회의 안전 수준과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 오히려 몇 단계 높은 성숙 단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문제의식은 어떤 것일까?
연일 쏟아지는 신문 기사를 매일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받는 뉴스 서비스를 통해서도 확인되듯이,
우리 사회에서는 '안전'을 보기 좋은 퍼포먼스라거나, 공개적인 결의 표현과 개인 의지의 강화 정도로 대체하는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경향이 강하고, 그로 인해 조직문화 또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실정임이 드러난다.
'실질'을 추구하기 보다 '형식'이 전부인 것으로 갈음되는 현실은 딱히 안전담당자 몇 사람, 현장 작업자 몇 사람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역사적인 문제이고 온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Text(형식)'에서 이제는 'Context(본질, 맥락)'로 옮겨가는 전환은 총체적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할 수 있다.
무엇이 형식이고, 무엇이 본질일까?
철도 현장의 안전 관련 주요 기능과 업무들을 통합해 효과적인 안전 실천을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시스템화 한 것이 '철도안전관리시스템'이다. 시스템이 구축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안전한 의식과 실천만을 강조하던 현실에서 나아가 작업장 요인, 관리적 요인, 정책적 요인, 문화적 요인 등을 포괄하는 유기적인 대응 태세가 안전 확보의 전제가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철도 안전은 '개인의 안전 수준과 노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안전관리시스템'을 통해서 확보된다고 단순화할 수 있다.(개인의 높은 안전의식과 실천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 따라서, 온갖 안전 문제점의 분석도 당연히 '안전관리시스템의 문제'로 환원 -개인은 시스템 속의 '나'로 환원해야 한다- 해서 그 문제점을 도출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적절한 시스템적 사고 방식이고 철학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안전관리시스템은 물리적 시스템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위험평가를 근본으로 하는 제반의 안전 관련 총체적 실천을 망라하는 것으로 매우 포괄적인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사전 예방적 안전 실천인 현장 작업자의 일상적이고 정기적인 '위험 평가(리스크 매니지먼트)'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구축된 시스템은 본질적 측면에서 ['위험 평가'의 제대로 된 작동 여부]에 달려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텍스트(형식)인 시스템 구축을 위한 가이드라인(기술기준) 정도의 실행 여부에 국한되어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추구하는 실체는 온데간데 없고, 문서나 만들어내고 지시만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증거는 현장 여러 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오래 전에 일본 철도 경영자가 밝혔다는 '안전은 철학이다'라는 말이 매우 정확하다 할 수 있겠다. (몇 해 전에 철도 경영자, 안전담당자 일부에게 이 말을 해주자 그저 웃기만 하더라. ㅎㅎㅎ.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는 건데, 나도 그러고 보면 웃기는 놈이다.)
길어지는 푸념은 그만두고, 오늘의 본론으로 넘어가보자.
며칠 전 사업소 현장에 게시된 지역 본부장(CEO)의 안전보건경영방침을 보고 깜짝 놀랐다. 놀랐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거의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느닷없는 문구에 넋을 놓고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솔직히 '참, 신기한 문구들이구만.. ㅎㅎㅎ.'하고 생각했다!)
안전보건경영방침은 경영자가 안전이 최고의 가치임을 공개적인 서면으로 표현해 CEO부터 현장 작업자까지 온 현장의 안전 문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물론 안전관리체계 기술기준에도 특정한 내용을 담아 공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어서 법적으로 강제된 사항이다.
이의 취지(맥락)는 안전시스템 작동의 중요한 전제가 '경영자의 안전 리더십'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안전리더십은 안전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경영자가 안전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경영에 반영(동일시)하는가 하는 걸 나타낸다. 보통 현장의 작업자는 경영자의 '안전 최우선'이라는 말을 듣지만, 일상의 다른 경로를 통해 사실은 '수익 추구'가 더 중요한 가치임을 확인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즉, 안전에 대해 강조는 그럴싸하게 하지만, 속내는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라는 말이다. 그런 경영 활동 아래에서 작업자는 '안전'보다 중요한 '수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으며, 현장의 안전은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이를 철도현장에서는 '안전'보다 '운행', '안전'보다 '영업 수익' 중심의 운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위험하다면 열차 운행을 멈춰서라도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CEO는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CEO의 발언은 현 손병석 사장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다. 내가 아는 한, 과거 CEO들은 '안전을 위해서 열차를 멈춰라'는 구두 표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현장에 전해지는 수 많은 메시지는 열차의 정시율을 금과옥조로 여겨 회복운전 관행이 강제되고, '열차 운행 중단'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CEO의 경영 방침과 현장의 현실이 괴리되고 있는 것이다.(물론 최근 태풍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변화된 태도가 감지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래서 경영자의 안전 리더십은 공개적으로 공표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라고 규정되는 것이다. 즉, 안전보건 문제를 경영의 핵심 사안으로 인식해 공개적으로 안전 리더십을 공표하고, 현장 작업자와 공유한 후 실질적인 실천도 그렇게 하라는 취지라 하겠다. 말로는 '안전'하고 뒤로는 '이윤을 추구'하는 의식과 관행을 경영자부터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현장의 안전문화 정착을 위한 중요한 전제라는 것이다.
보통 많은 기업의 안전보건경영방침은 홈페이지 등을 통해서 누구나 열람이 가능하다. 참고로 현재 철도공사 사장의 안전보건경영방침은 다음과 같다. (철도공사 홈페이지에서 옮겨옴)
안전 최우선을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방법론의 대강을 담고 있다. 이러한 방침을 여러 건 비교하면 대체로 해당 CEO가 주로 강조하는 안전 문제의 방향성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과거 최고경영자의 안전경영방침에는 안전문화를 구성하는 세부 요소로서 보고하는 문화, 협력하는 문화, 학습하는 문화 등을 거론해 현장 작업자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4대 안전문화'가 그것인데, 지난 철도발전위원회에서 철도노조는 4대 안전문화가 문구로만 남겨지지 않도록, 구체적인 사업을 공동 추진하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물론, 과거 방침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안전문화에 대한 구시대적인 패러다임은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으나(특히, 경직된 매뉴얼 준수 문화를 표현하는 '지키는 문화'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목적에 맞지 않으니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한다. 어쨌든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안전 경영의 의지를 담고 있는 건 분명했다.
*매뉴얼 준수 문화와 관련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http://blog.daum.net/jmt615/1097
그런데, 아래를 보자.
(물론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많은 지역의 경영방침을 봐온 나로서도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기본도 모르는 황당무계한 안전보건경영방침
문제는 '재무경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로 시작하는 마지막 문단에 있다. '경영 혁신과 마케팅 역량 강화를 통해 영업 수익 만회에 최선을 다하자'는...... 헐!!! 웃기고 자빠지시겠다!!!
오해할 수도 있어서 미리 밝혀두지만, 여기서 논하는 것은 '경영 혁신과 마케팅 역량 강화를 통한 영업 수익 만회'라는 가치 자체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이마저도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경영의 문제로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안전보건 경영방침이 가지는 의미에 국한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해당 경영자 한 사람에 대한 비판 목적이 아님도 밝혀 둔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영업 수익 극대화를 추구하고 싶으면 별도의 방침을 천명하거나 다른 메세지를 현장에 주면 될텐데, 법적으로도 안전 최우선의 가치를 공표하라고 강제하는 서식에 굳이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 안전보건경영방침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참고하던지, 그도저도 아니라면 안전부서의 책임자(안전부서 스태프들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다!!)에게 문의를 해보면 될터인데 도무지 이런 황당무계한 방침이 어떻게해서 이리도 버젓이 걸려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산업안전보건위 회의가 개최되었을텐데 노동조합은 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까? 위의 경영방침대로라면, 현장 작업자가 '수익 추구'에 혈안이 되어 '안전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등의 문제가 없겠다. 그래도 저 경영자는 사고가 나면 왜 안전문제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는 거냐고 현장을 타박할 것은 뻔하지만. 정작 본인이 어떤 메세지를 현장에 주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이게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안전 문제에 앞서간다는 공기업의 안전 현주소이다. '말하면 그대로 실현될지어다.' 우리 나라의 중요한 관리나 경영자들은 모두 다 이런 신기에 가까운 현실이 열릴거라 기대하고 오늘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루에 3~4명의 노동자가 죽어나가는 판국에도 여전히 본인들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2항의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부분도 맥락을 모르는 내용으로 보인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것이 안전방침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분명하게는 수평적 문화가 안전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모르니 두루뭉술하게 되어 버린 게 분명하다. 수평협력적 문화는 위기에 대응하는 안전 조직에게 중요한 요소이자, 일상적인 안전 커뮤니케이션의 정착을 통해 위험 관리가 원활하게 작동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 요소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분명한 내용이 담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내막을 조금이나마 아는 안전 스태프가 있다면 곁에서 조언을 주어야 마땅하나 그런 스태프가 있는지도 의아하다. 이래저래 듣기 좋고, 보기 좋은, 그래서 뭐하는지 모르는 방침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덧.)
안전문제를 고민하는 전문가가 있다면 철도 현장의 안전경영방침을 모아서 분석하고 비판하는 연구를 했으면 좋겠다. 안전방침이 왜 공표되어야 하는지, 더군다나 법적으로 강제되는지, 안전문화와 안전체계는 어떤 관련이 있으며 그 속에서 안전방침은 어떤 영향을 주는지, 해외의 사례는 어떠한지, 취지에 어긋나는 사례는 무엇이 있는지 등을 담으면 아직까지 경영진이나 관리 누구도 학습하지 않은 '컨텍스트 학습'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20년 8월 5일)
-철도안전관리체계 기술기준에 담긴 '안전경영방침' 공표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 안전경영방침
1.2.1 안전경영방침의 수립 등 철도운영자등의 최고경영자는 문서화된 안전경영방침을 수립, 실행 및 유지하여야 하며, 안전경영방침은 다음 사항을 포함하여야 한다. 가. 철도안전에 대한 경영진의 참여 나. 안전경영을 기본가치로 하는 의사결정의 추구 다. 안전경영에 대한 임직원의 역할과 책임 라. 철도안전관리체계의 적절한 이행방법과 자원의 배분 마. 안전성과에 따른 안전경영의 지속적 개선 의지 바. 안전경영과 관련하여 적용되는 법령 요구사항 및 철도운영자등이 동의한 그 밖의 요구 사항을 준수하겠다는 의지 등
1.2.2 안전경영방침의 제공 등 철도운영자등은 수립된 안전경영방침을 직원, 이해관계자 및 일반인 등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홈페이지 게재 등의 방법으로 공개 또는 제공하여야 한다.
1.2.3 안전경영방침의 검토 최고경영자는 안전경영방침을 주기적으로 검토하여야 하며, 검토 시 안전관리변화, 철도이용자 등의 요구 등을 감안하여야 한다. |
'가혹하고 이기적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전 없이 운행 없다?' 환영하지만 글쎄요... (0) | 2021.01.18 |
---|---|
산재에 대한 철도공사의 한심한 입장을 접하며...! (0) | 2020.07.23 |
안전을 따지는 관료들이 바뀌지 않는 한 안전은 확보되지 않는다! (0) | 2020.07.04 |
2.18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_이승우 (0) | 2020.02.18 |
백서 <김용균이라는 빛>에 실린 김미숙 어머니의 구술 전문 (0) | 2019.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