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보기] http://blog.ohmynews.com/yuchangseon/357358
설 연휴 기간동안 시청자들의 화제는 단연 ‘세시봉’이었다. 연휴 직전 MBC TV '놀러와’를 통해 이틀 동안 방송된 세시봉 특집은 ‘세시봉 현상’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TV 앞에 앉은 중장년층은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노래에 빠져들었다. 디지털 시대에 잊고 살았던 아날로그 향수를 세시봉은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지난 수십년을 정신없이 달려온 그네들에게 그런 시간도 얼마 만이었던가. 그런가 하면 청년층도 아이돌과는 다른 세시봉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며 부모세대의 노래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비로소 마음을 열고 느끼게 되었다.
ⓒ MBC
세시봉을 보고 감동먹었다는 찬사가 곳곳에서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생방송 시청을 놓쳤던 필자도 다시보기에서 다운로드 받아 뒤늦게 시청하며 아름다운 노래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시봉을 시청하면서 내내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빈 구석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세시봉의 노래에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시봉류의 문화는 1960~70년대 청년문화의 전부는 아니었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가 당시의 청년문화를 상징한다고 했지만, 정치적 암흑기가 낳은 시대의 질곡 속에서 그런 낭만조차 누릴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그런 낭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시봉의 노래를 부르는 대신 밤이면 페드라에 모여 김민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정성이 담겨있던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한 그들은 이내 ‘흔들리지 않게’와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것임을 스스로에게 맹세하곤 했다. ‘웨딩케익’ 같이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퍼지던 세시봉과는 달리, 페드라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곤 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세시봉 문화는 ‘나의 문화’는 아니었다.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조영남도 있었지만 또 다른 곳에는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이 있었고 한대수의 '물좀 주소'가 있었다. 양병집, 방의경도 있었다. 그리고 저항과 반전 가수 밥 딜런, 존 레논, 존 바에즈, 멜라니 사프카도 있었다.
그러나 세시봉 특집에서는 그 노래들은 들을 수가 없었다. 세시봉의 노래들은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왔지만 그 시절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래서 세시봉을 보고 너도 나도 감동먹었다고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잊어서는 안될 그 시절의 아픈 노래들은 빠져있는데, 사람들은 그에 상관없이 열광하고 있구나....그 시절에도 무대에서 소외된채 불리워져야 했던 노래들이 지금도 다시 그런 것 같아 솔직히 섭섭한 생각이 드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허전함은 단순히 양희은이 나와 ‘아침이슬’ 한곡을 부르는 것으로도, 조영남이 ‘김민기’ 이름을 들먹이며 그에게 술을 사준 얘기를 하는 식으로 채워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시절 노래에 대한 기억은, 아팠던만큼 아프게 기억할 때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김민기가 세시봉 특집에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김민기의 노래가 김나영의 춤 속에서 웃음과 함께 들려지는 것은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도 한 번의 특집에 세시봉의 친구들 이상의 문화를 담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면 세시봉 특집이 그런 식으로 나간 것은 다른 선택치가 없었을지 모른다. 충분히 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시봉을 보고 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의 노래와 우정을 보고 감동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100퍼센트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좁음일까. 노래를 노래로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어있는 사고의 결과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그 시절에 세시봉의 노래가 있었다면 페드라의 노래도 있었음을, 세시봉에 열광한 사람들이 함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한 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문화의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 세시봉의 노래도, 페드라의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세시봉의 노래와 우정을 듣고 보며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페드라에서 불리웠던 노래에도 세시봉 이상의 뜨거운 눈물과 사연들이 담겨있었다. 그 사연들을 꺼내놓기 시작한다면 어디 세시봉의 감동에 비할 바이겠는가. 그래서 아직 TV 프로그램에서는 담아낼 수 없다 해도, 페드라에서 불리웠던 아픈 노래들 또한 우리 문화사에 아름답게 기록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그러면 세시봉 특집을 보고나서 허전했던 마음 한 구석이 언제인가는 채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 '페드라'는 신촌에 있던 작고 허름한 술집이었습니다. 당시 신촌 대학가의 '운동권'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시국을 논하며 저항의 노래들을 부르곤 했습니다.
'낯설은 아쉬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80년대 `항소이유서`이후 2010년대 명문장 - 2MB18nomA 이의신청서 (0) | 2011.06.22 |
---|---|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대상에 힙합그룹 가리온! (0) | 2011.03.08 |
꿈꾸는 아내_한보리 (0) | 2011.01.30 |
서시_나희덕 (0) | 2011.01.30 |
폭설_도종환 (0) | 2011.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