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0일 새벽에 돌아가신 큰아버님 장례.
함께하신 한 집안 어르신의 말씀.
'우리 집안의 한 세대가 끝났구나.'
99년 4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같은 해 11월에 아버님이, 작년에도.. 그리고 30일 새벽 큰아버님까지..
1929년 출생, 향년 83세.
하지만, 아직 우리 집안의 한 세대가 끝났는지는 확인 불가능하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남한으로 한정해서 본다면' 이라는 조건을 붙여야 맞는 말일뿐이고,
북녘에 아직 살아계시리라 생각되는 큰아버님을 감안한다면
우리 집안의 한 세대는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살아계신다면 1927년생 85세)
나는 한참 자랄 때까지
아버님 형제분들이 몇 분이나 되는지 모르고 지냈다.
(물론, 그닥 큰 관심을 갖지 않은 탓도 있겠다.)
지난 2000년 8월 15일.
6.15 공동선언이 탄생하고 1차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서
우리 집안에선 처음 북에 계신 첫째 큰아버님(김영호)의 생존을 확인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5일 저녁 한겨레신문 인터넷판]
1999년 4월, 94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할머님께서는
홀로 앉아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영호야, 길호야!'를 자주 부르시곤 하셨다.
가장 맏아들인 영호 큰아버님은 김대중 대통령과는 2년 후배(목포상고)로서
전쟁통에 행방불명되었고, 이후 70년대에 북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단지 소식을 접하게되었다는 것 만으로 남에 계신 형제분들이 1주일 동안 보안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길호 큰아버님도 목포상고에 다녔고 밴드부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고 한다.
역시 전쟁통에 행방불명되었다.(나중에 입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죽음을 둘러싼 소문 또한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길호 큰아버님의 주검을 찾기 위해서 아버님도 생전에 많은 노력을 하셨고,
최근엔 큰 형님과 나도 몇 차례 소문을 좇아 무덤을 찾기 위해 수소문해보았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한 세대를 함께 지내온 형제들 중
한 사람은 북녘에서,
한 사람은 전쟁통에 주검이 되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한 사람은 13년전 안타까운 죽음을 선택했고,
이 모든 슬픔을 묵묵히 견뎌오신 큰아버님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입관을 하고, 마지막 화장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이제 아버님을 만나셨지요. 형제분들이 만나셔서 정말 아무 걱정없이 편하게 잘 지내십시오.'라고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우리와 같은 이산가족이 천만명이라고 하는데..
그 가족마다 안고 있는 말 못할 사연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한 평생을 헤어져 지낸 백발이 무성한 어르신들이 눈물 속 상봉을 마치고
또 언제 만날지 모를 이별을 해야하는 세상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느 누가 그런 비상식을 강요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어느 누가 그런 권리를 부여했을까?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진전시킨 화해와 통일의 기운이라도
조금씩 진전되었다면 지금쯤 아마 훨씬 편하게 연락하고 살지 않을까 싶다.
'비와 외로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모]참대화를 위해 생각해 볼 것. (0) | 2011.07.24 |
---|---|
벌초를 해야 여름이 지나간다! (0) | 2011.07.03 |
백자의 <가로등을 보다>를 구입하다. (0) | 2011.05.07 |
[소리모짱님]의 방문 (0) | 2011.05.07 |
잠에 취한 집 밖으로 구름이 멋지다! (0) | 2011.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