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치는 펭귄

김남희가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로 위로하다.

대지의 마음 2016. 7. 5. 18:28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여행 작가 김남희씨의 글은 언제고 실패가 없다.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내게 이 책이 주는 위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머릿속에 불덩이가 가득한데 뭐에 집중할 수 있겠나 싶다가도 예쁜 사진에 그리고, 그녀가 적은 글월에 빠지더니 결국엔 그녀의 여행 한켠을 조용히 따르게 된다.



지금 내게 불현듯 아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자리한 불덩이. 그건 지금 노사간에 큰 마음을 갖고 시작했던 공동 연구 작업 때문이다.

'철도 안전'에 대한 양심이라기 보다는 실무를 맡는 상대와 연구자들을 경험하면서 커져가는 불만과 분노(?).

(보다 근원적인 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내 자신에 대해.)


그들의 처지와 고민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더욱 절망스럽다.


의도하지 않은, 그러니까 강요된 불합리,. 그를 정당화하는 무서운 배후 시스템.

정작 '철도 안전'을 가로막는 것은 국토부라는 존재와 그로 인한 정책 추진의 관성(?)이리라.

이런 게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면 너무 거창한가?


...


이번 책에서도 그녀의 말 중 몇 대목을 옮겨왔다.

어떤 건 전후의 사정을 고려해, 그리고 어떤 건 그저 홀로이 있어도 그것만으로 깊은 생각을 불러오기에...



1. 자신이 하는 노동의 결과물과 유리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직업에 있어서 도덕적 회색지대에 서 있다. 명징하게 도덕적인 직접이란 것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여행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다.


2. 철학자 지젝은 공정무역 커피 구매와 같은 '윤리적 소비'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환경을 얼마나 손상시킨거지.' 이렇게 말하면서 값싼 출구를 찾고 있는 셈"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3.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가장 부럽다. 나 또한 생태적인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면 두렵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삶과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간격은 얼마나 아득한지.


4. 한국인은 인종차별 의식이 강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더니 여자친구의 남동생에게 받은 충격을 털어놓는다.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거"라고 답해서 어이가 없었다나.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뭔데?"라고 재차 물어도 답하지 못했다면서, 누구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할 수 있는데도 그런 삶을 부러워만 할 뿐, 미래를 위해 저축만 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마음 아팠다고 한다.


5.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에 균열을 만들어냄으로써 더 큰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데... (중략) ... 가장 높은 산을 오르고, 가장 깊은 숲을 거도, 가장 넓은 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이 그만큼씩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어떠한 질문도 없이 다니는 여행은 그저 여권에 도장 하나를 늘려가는 일일 뿐이다. 우리의 여행은 사유를 동반하는 여행이어야 한다.


6.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다르게 단련된 감각이 끝없이 충돌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 다른 감각을 조화시킬 수 있느냐에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달려 있을 것이다.


7. 여행지에서의 나와 일상의 나. 여행지에서 나는 타인에게 쉽게 말을 걸고,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너그럽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토록 여행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일상으로 돌아와 짐을 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맨얼굴을 대면하게 된다. 평범하고 지리멸렬한 내 얼굴에 지칠수록 다시 여행을 꿈꾼다.


8. 열린 창으로 들려오는 텔레비젼 소리, 아이를 꾸짖는 엄마의 화난 목소리, 집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남자들.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일요일 오후다. 일상의 소리와 풍경으로 가득찬 골목들. 너무 으슥해서 겁이 나는 그런 골목이 아니라, 적당히 깊고 정겨운 골목들.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가 지나가고, 집 앞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남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깔깔거리고 소리지르고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있고, 그런 녀석들을 부러운 듯 흐뭇한 듯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이 있는 골목. 세상의 모든 골목은 저마다의 골목 대장을 품고 있다. 골목은 세상의 모든 소년 소녀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전, 집과 세상을 연결하는 중간 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