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치는 펭귄

김민철의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대지의 마음 2016. 8. 5. 10:40





모든 요일의 여행(김민철 지음, 북라이프)


□올 여름 독서모임 '글방' 선정 도서. 여름을 나기에 더없이 좋은 책. 요즘 같은 폭염에는 더욱더.

□'낯선 공간을 탐닉하는 카피라이터의 기록'이라는 부제에 맞게 그녀의 글은 한 문장 한 문장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매 장의 서두에 등장하는 시가 참 좋은데, 그 중 몇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트램이 섰다.

문이 열렸다.

정거장도 아닌데.


아무도 내리지 않고

아무도 타지 않는다.

그저 동네 아줌마들과

차장의 수다만

타고,

내린다.


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만나기 위해 떠나온 것이다.


(그저 평화로운 풍경이다. 옆에 보이는 사진은 시가 표현한 장면이 그대로 보인다. 우리 중 누군가는 '아니 저렇게 트램을 세운다는 게 말이 되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모든 트램이 아는 사람을 만났다 하여 정차할 것은 아닐 것이다. 설령 아는 사람을 만나도 제대로 운행해야 할 상황에선 자기 책임감을 가지고 운행에 전념할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여유로운 상황을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탑승객도, 드라이버도 양해할 것이다. 복잡하게 따지지 않아도 읽는 이의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또 이런 시의 구절도 보이는데, 그건 놀랍도록 정확한 표현이다!)


집 나가면

몸이 고생이다.


하지만

집을 나가지 않으면

마음이 고생이다.




(낮선 곳을 향한 여행에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을 이렇게도 헤집는다.)


다 안다, 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은 다른 도시로 떠나기로 했다.

다 아니까, 벌써 9일째니까.


익숙한 리스본은 안녕.

이라며 술을 마시고

실핏줄 같은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모조리 낯설다.


(중략)


며칠 머물렀다고

그새 또 익숙한 길로만 다닌 것이다. 나는

낯선 길은 숙소 바로 앞에도 있었는데.

먼 곳에 답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나는.


다음날, 나는 다른 도시로 떠나지 않았다.

(후략)




오래 기다려

천천히 먹는다.

서로 이야기하고 웃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맛있는 시간이다.


문득, 이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천천히.

음미하며.

같이.




(그리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제일 멋진 시. 난 이 시에 대한 소감을  여백에 '멋진 글, 멋진 할아버지, 멋진 삶!'이라고 적어두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깎고 있었다.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대다가

문득, 멈췄다.

칼을 들고 나무를 다듬는 할아버지가

내 카메라 소리에 놀라 다칠 수도 있으니

우선, 기다렸다.


한참 후, 할아버지가 고개를 든다.

눈이 마주친다. 미소가 번진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찍어도 좋겠냐고.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 들어오라고.

할아버지의 온화한 기운과 나무의 온화한 기운이

온 공방을 감싸는데 미묘하게 감동적이다.

군더더기 없는 선부터 매끄러운 표면까지 미묘하게.

할아버지의 작품은 꼭 할아버지를 닮았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오전에는 포도밭에서 일해.

농장이 얼마만 하냐면 팔만 헥타르야. 매우매우매우 커.

그리고 오후에는 나무를 깎아. 취미야.


이게 취미라고?

놀라는 우리를 뒤로하고

할아버지는 천천히 작업대로 돌아간다.

공방에 흘러나오는 브람스 교향곡에 맞춰

휘파람을 불며 다시 나무를 깎는다.


공방 한편에 삼십대의 할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다.

그때의 청년도 나무를 깎는 중이었다.

그때의 청년도 오전엔 포도밭에서 일했겠지.


이건 또 어떤 삶인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것이 진짜 사는 게 아닌가.

마음이 움직였다.

이 삶이 작품이 아닌가.

할아버지를 다시 봤다.


그때 남편이 말한다.

"이것 봐, 할아버지 간판이야."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2008)는 것.


(중략)


머뭇거리지 않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여행을 떠올렸다.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알아버렸던

수많은 유적지를 떠올렸다.

눈먼 채로 돌아다녔던

수많은 도시들을 떠올렸다.

이제 막 도착했으면서

다 안다는 듯 굴었던 나를 떠올렸다.




더 머뭇거려야 했다.

더 아마추어가 되어야 했다.

더 오래 바라봐야 했다.


(후략)




□그리고, 잠시 머물러 다시 읽어봤던 구절들은....


-'다시는 오늘 같은 날을 만들지 말자. 속도를 줄이고, 욕심을 줄이자.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 독약을 섣불리 마셔선 안 된다. 지도와 정보를 내려놓자. 우리의 취향과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속도를 찾자. 오늘은 겨우 시작이니까. 시작의 미숙함은 언제나 용서되는 법이니까.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서 씻고 잠을 자자. 내일부터는 여행자가 되어보자. 우연한 행복을 찾아보자. 진짜 여행을 시작해보자.'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마을, 판자노에 있는 체키니 정육점, 테이블보에 '속을 비우고 와라. 우리는 조금만 먹을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비가 오는 것 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느낌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의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평일만 있는 일상이 잔인한 것처럼, 열심히 여행하는 순간만이 가득한 여행도 잔인한 것이었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했다.


해가 저물자 어김없이 불안함이 밀려왔다. '정말 이래도 되나,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왔나.' 죄책감까지 뒤엉켰다. 애써 그런 생각들을 버리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또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삶의 관광객이었다. 잠깐 들렀다 멀리 떠나는 관광객. 순간을 영원이라 생각해버리고, 파편을 전부라 착각해버리는 관광객. 단골술집이라며 우리가 아무리 친한 척해봐도 변하는 사실은 없었다. 우리는 누노의 일상이 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다른 일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유적이 되길 바랐던 건가.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그 모습 그대로일 유적지의 돌덩이가 되길 바랐던 건가.


-마법의 질문, 'What's your favorite?' ... 그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뿐인데 '나에게 인생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취향을 동시에 다 불러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불꽃을 보지 못한 것도, 맨 하늘을 바라보다 돌아선 것도 결국 그 순간의 내 선택인 것이다. 어차피 이 곳에 있으면서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장에서 막 튀어나온, 올 하나 풀리지 않은 비단 같은 여행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 따위는 여행자에게 없다. 그 완전한 비단만큼 불완전한 여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점을 만들어야 한다. 나만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그 선택만큼 이번 여행에 옳은 것은 없었다고. 그 선택 덕분에 길을 잃었고, 돈을 많이 써버렸고, 가야 할 곳을 못 갔고, 그래서 결국 희한한 날이 되어버렸다고 할지라도 그 선택이 나의 여행을 만든 것이다.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입증하듯 기네스는 더블린 기네스 팩토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맛이 없어졌다.


-(밀란 쿤데라, 불멸, 2010)

대체 '유용하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유사 이래 모든 인류의 유용성의 총합은

바로 오늘날 이 세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용한 것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없지 않은가.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필요없는 시간이었다. 텅 빈 시간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정말 그리워하겠구나. 유명한 관광지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이 광장은 그리워하겠구나. 특색 없는 이 맥주가 간절해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이 카페가, 지금 이 기분이, 나른함이, 이 속도가, 저 멍한 시선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이 모든 무용한 시간이 그 무엇으보다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마음이 복잡한 건 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