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사발
어린 시절..
한쪽 구석에 자리한 구멍가게,
반대쪽엔 조그만 탁자 두 개가 비좁게 붙은 식당.
방 2개에 넘쳐나는 사람들
우리 집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큰 자전거에 실은
막걸리 통은 근처 주조장에서 방금 내온 것이었다.
학교가 쉬는 날이거나
학교를 파한 느즈막한 오후.
친구들은 양은주전자를 들고
부모들 심부름으로
우리 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주전자 가득 담긴 막걸리 중
친구들 입 속으로 들어간 양도 상당하리라.(?)
손님이 나간 후
빈 자리에 남은 막걸리며 안주거리며
시키지도 않는 막걸리 잔 하나둘 나르며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홀짝거리며 들이키는 맛이
기가 찼다.
어른들은 모르겠지 하지만
벌개진 얼굴에 쓰여진 흔적은 어쩔 수가 없겠지.
한번쯤 혼낼만도 하지만
어린 아들, 딸 불러놓고
막걸리 채운 냄비를 불가에 올리며
설탕 맛도 곁들이고
달걀도 풀어 넣는다.
동생 놈은 좋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가
술을 끓여서 주는 것이
좋다고 지르는 환호성이었으니...
지금도 술을 잘 먹는 이유가 어디서 왔을까?
막걸리 두사발
대학에 합격했다고
집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님 왈 "빨리 와라!"
"왜요?"
"파티해야지."
두어시간 걸려 도착한 집엔
진수성찬(?)에 술 까지 떡하니 있었다.
오라~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
껀수하나 찾으셨구나...~!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내가 배운 건 학문이 아니었고
하루 종일(조금 과장일까?) 막걸리 마시는
흥미에 푹 빠졌었다.
거기가
주점 '광장'!
이 학교를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주인 어른을 부르길 '아버지', '어머니'하는 곳.
그냥 주인도 뭣도 없다.
들어가서 술 가져오고
안주가져오고 마시다 없으면
외상값이 빽빽이 적힌 노트 한 켠에
자랑스러운 동아리 이름.
적어주면 되고...
시도때도 없이 마시는 막걸리 문화는
'광장'에서만이 아니었다.
대강당 앞에서도 정문 앞이건
조금만이라도 앉아 있을 곳이 보이면
으레 막걸리가 함께 있었다.
대학 입학한 지 1년이 안되어 치르게 된 중간고사
그날도 '광장'에서 점심 라면과 함께 시작한 막걸리가
결국 3~4시를 넘기고 있었고..
시험을 보러 갈까 말까 하는 고민도
취해가는 술과 함께 무디어 지고 있었다.
친절한(?) 선배왈,
"시험은 꼭 봐야한다!"
"예!"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대까지 뛰었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거리.
점심 라면과 버무려진 막걸리가 적절히 배합되고
이윽고
시험장 뒤 켠 문을 열고 들어선 젊은이.
시험을 위해 부리나케 뛰어온 그 젊은이의
헌신성이 돋보일 바로 그 순간.
자리에 앉으며 바닥에 쏟아내기 시작하는 건
오전 내내 담았던 막걸리와 라면 부스러기 안주들...
시험을 보기 위해 보인 성의 정도만 기억할까?
막걸리 세사발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
술을 좋아하시는 거야 이미 적었고...
어느 정도 좋아하실까?
시골집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큰 아들에게
어느날 걸려온 전화.
"감나무 밭에 농약 좀 치자!, 이번 주말에 내려와 줄이나 잡아라!"
"예!"
일요일 오전,
트럭에 실린 장비들의 면면은
과연 감나무 밭에 농약을 할 준비들이었다.
이 쯤되면 일하는 분위기도 괜찮고..
부엌 저 쪽에서 터져나오는 실갱이
"안주가 그걸로 되겄소?" 어머님 말씀.
바라보니 조그만 접시에 담긴 고추와 된장.
그리고 큰 막걸리 두 통.
과연 그렇지..
자, 이제 출발해야지 하고 저수지 밑까지
올라가던 트럭이 잠시 멈추더니
콧노래 비슷한 소리를 내시던
아버님 왈,
"아이구, 농약병을 안 실고 왔구나!!"..ㅋㅋㅋㅋㅋㅋ...
그러면 그렇지.
농약치러 가도 농약병만한 막걸리 통은 실어도
농약병을 실지 않는 강인한 집착력!
그것이 아버님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일이 20분일까, 30분일까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쉬었다 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말씀.
당산나무 아래 연자방아 댓돌 위에 앉아서
고추 된장을 곁들여 부자 간에 나누는 막걸리 맛이라니..
아직도 그때의 당산나무 아래 불던
시원한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
막걸리 한 사발 굵은 땀이 한 사발
우리들의 인생사도 한 사발
막걸리 한 사발 지난 세월이(별빛 담아서)
한 사발 우리들의 꿈 한 사발
뜨거운 가슴 이 가슴으로
자갈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어느새 굵은 열매가 열매가 열리네
썩은 땅일랑 갈아엎어야
어린 싹이 예쁘게 잘 자랄 수 있지
썩은 가지는 잘라버려야
높고 높은 나무로 잘 자랄 수 있지
나의 친구야 나의 벗들아
내가 가는 이 길을 너무 걱정하지마
세월이 가면 언젠간 너도
붉은 황토와 같은 내 마음 알아줄거야
<막걸리 한 사발_백자의 기타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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