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건강한 에너지를 받았다.
술 먹어 용산 숙소에 자빠진 무거운 몸을 아침 일찍 일으켜서 결국 강변을 걷게 만든 장본인이다.
읽으며 기운을 받은 몇 구절을 아래에 옮겨둔다.
오늘 새벽, 나는 일어날까 말까 하는 고민의 기로에서 몸을 일으켜 1만보를 걸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도 그럴지는 미지수다.
그래서 에버노트에 남겨둔 하정우의 글을 옮겨오기로 했다.
읽고 또 읽으면 자신있게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기분을 전환하는 법은 저마다 다르다. 마음 편한 사람과 수다를 떨기도 하고,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방법들은 확실히 즉각적인 효과가 있지만, 부작용이 따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에 해롭거나, 내 기분은 바꿔주지만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치며 상대의 기분을 구겨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부작용 걱정 없는 걷기를 선택하는 편이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추워지면 외투를 입는 것처럼 나는 기분에 문제가 생기면 가볍게 걸어본다. 누구에게나 문제없는 날은 없고 고민 없는 날도 없다. 고민이 내 머릿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걷고 돌아오면 금방 곯아떨어진다. 불면증이나 한밤의 우울을 모르고, 어디서나 꿀잠 자는 나의 비결은 역시 걷기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이걸 다 어떻게 그리지?’ ‘못하면 어떡하지?’ 갑자기 두려웠다. 내가 약속해버린 모든 것이. 내가 해내야만 할 모든 일들이.
그래도 어떻게든 그려야겠다 싶어서, 한 달 동안 꾸역꾸역 악으로 깡으로 그림을 그렸다.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내리 스무 작품을 미친듯이 그렸다. 하루 열세 시간에서 많게는 열다섯 시간씩 그림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저 공포에 질려서 ‘나’를 복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체중이 15킬로그램이나 불어 있었다.
-갤러리에서는 의례적인 칭찬을 하고 내 그림의 장점을 주로 언급하던 그 미술평론가가 사석에서 내게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디자인에만 신경을 쓰시나요?” 그 개인전의 한 코너에는 내가 시시때때로 쓱쓱 그린 스케치를 두었고, 넓은 공간에 완성도 있는 작품들을 전시해두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왜 저 구석에 있는 스케치처럼 자유롭게 그리지 못하고 완성작들은 디자인 요소에만 매달렸느냐’는 뼈아픈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내게 그 말은 곧, 왜 이렇게 남들 시선만 신경쓰며 사느냐는 물음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남의 눈만 신경쓰고 사는 사람.’
-다이어트 돌입 첫날, 나는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해 김포공항을 향해 걸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가다니 거 참 희한하다 싶겠지만, 그때 나는 이동하기 위한 일 분 일 초까지 오롯이 살을 빼는 데 써야 했다. 부지런히 걸어 김포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냉큼 3시 반 비행기를 잡아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숙소에 도착한 후 짐을 풀자마자 나와서 인근의 올레길을 네 시간 동안 걸었다. 내가 가진 시간을 꽉 채워 서울과 제주를 걸으니, 뒤숭숭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어느 정도 해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튿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한라산 등정에 나섰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숙소에서 삼십 분 정도 몸을 녹였다. 그리고 다시 나가서 내리 여섯 시간을 걸었다.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다. 셋째 날, 아침 6시에 일어나 조식을 먹었다. 7시 출발. 밤 11시까지 쭉 걷다가 들어왔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일과 휴식을 어중간하게 뒤섞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을 휴식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일이 바쁠 때 ‘나중에 몰아서 쉬어야지’ 같은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지 않는 것.
단언컨대 무작정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꼼짝도 안 한 채 이불 둘러쓰고 싶은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이렇게 힘든데 뭘 더 어떻게 움직여?’ 의구심부터 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힘들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되뇌게 되었다. ‘아, 힘들다…… 걸어야겠다.’ 나는 힘들수록 주저앉거나 눕기보다는 일단 일어나려 애쓴다.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정신과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환자들에게 그게 무엇이든 루틴을 정해놓고 어떤 기분이 들든 무조건 지킬 것을 권한다.
-내가 지키는 루틴은 다음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단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걸으며 몸을 푼다. 아침식사는 반드시 챙겨먹는다. 작업실이나 영화사로 출근하는 길엔 별일이 없는 한 걷는다.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좐큐는 핫팬츠를 입고 엄청나게 걷는다. 우리 걷기 모임의 에이스다. 하루 16만 보라는 믿을 수 없는 ‘세계신기록’을 찍어 핏빗계의 전설로 남았다. 핫팬츠를 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걷기 편한 옷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걷기에 미쳐 있다. 내가 저녁 7시에 우리 동네에서 만나 막걸리 한잔하자고 연락하면 좐큐는 집에서부터 걸어온다. 걷기 모임 열혈멤버이니 약속장소까지 걸어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좐큐는 경기도 광명시에 산다. 그리고 우리 동네는 신사동이다. 좐큐는 아침 10시에 출발해서 나를 만나러 걸어온다. 좐큐의 하체는 축구선수처럼 튼실하다. 그래서 핫팬츠를 입으면 시선 강탈, 보는 사람이 약간 민망해질 정도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패션을 고수한다. 얘는 정말 걷기에 미친 놈이 아닐까? 나도 걷기라면 한가락 한다고 자부하지만, 좐큐의 스케일에는 도무지 미치지 못한다. 좐큐는 만약 15일에 전라도 광주에서 촬영이 있다 치면, 12일경에 대전까지는 차를 타고 이동한 후 자신만의 대장정을 준비한다. 3박 4일에 걸쳐 ‘걸어서’ 촬영장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좐큐에게는 ‘잘 지내냐’는 안부보다 늘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좐큐야, 너 지금 어디니? 또 걷고 있니?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후배들이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가슴이 아프다. 내게도 당연히 그런 시간이 있었다. 정해진 스케줄도, 무대도 없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만날 사람도 없고, 약속도 없다. 더 가혹한 건 이런 날들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 빠지기 딱 좋은 시기다. 그때 나는 우선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몸에 활력이 넘치고 표정도 생생하다. 배우에게 그 첫인상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디션은 삼 분 안에 결정되는 잔혹한 경쟁이지만, 보석은 그 짧은 시간에도 스스로 빛을 발한다고 믿었다. 내 몸에 기운과 에너지를 늘 충만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막막했던 시절, 헬스클럽만 총 세 군데를 다녔다. 한 군데는 친구 아버지가 하는 곳이라 공짜로 이용할 수 있었고, 또 한 군데는 한남동에 저렴한 곳이 있기에 냉큼 등록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시설 좋은 강남 헬스클럽의 평생회원권을 70만 원에 양도받아서 수시로 나갔다. 누가 보면 흡사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라도 준비하는 배우처럼 악착같이 운동했지만, 사실 그 당시 나에게는 딱히 할 일이란 게 없었다. 별일 없으면 자빠져 있지 말고 걷기라도 하자는 것이 유일한 나의 생활 신조였다.
-영화를 보는 것도 공부이니 하루에 서너 편씩 몰아서도 보고 같은 영화를 계속 돌려보기도 했다. 백 번 넘게 돌려보면서 외우다시피 한 장면을 길을 걷는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안, 혼자 있는 동안 되새김질했다. 또 일주일에 몇 날을 정해놓고 영어와 피아노도 배우기 시작했다. 언제 어떤 배역을 맡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준비가 되어 있으면 나중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밤이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한강을 따라 걸으면서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그때 평균적으로 하루에 여섯 시간씩은 걸어다녔던 것 같다. 걸으면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었다. 배우란 분명 선택받는 직업이지만, 그 선택받을 수 있는 무대까지 걸어가는 것은 내 두 다리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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