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밤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2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고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3
몇 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지난번처럼
제주도 예멘 난민문제로 강자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고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
난 동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들을 성지순례 중이었다.
어느날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를 찾아 헤매다가
중앙광장 근처 거의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마트 유리문에 붙은 독일어 공고문을 친구가 번역해주었다.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어제 갑자기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이 포함된
200여 명의 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매장의 모든 식료품들을
구호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운 물품들은 이미 주문해놓았으며
거듭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고객 여러분들의 마음을 믿습니다.
'낯설은 아쉬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아있는 시신경 23%... 원상복구는 안됩니다_이준호[오마이뉴스] (0) | 2021.07.04 |
---|---|
나의 버킷리스트_정호승 (0) | 2021.07.01 |
나는 정말 건강을 확신하는가?_임동규[출처 : 내 몸이 최고의 의사다] (0) | 2021.06.16 |
White Lies? Five Milk Myths Debunked (0) | 2021.05.20 |
차를 마시는 최상의 방법_책 '어떤 행복'에서. (0) | 2021.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