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버킷리스트
_정호승
서울을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갈아입을 셔츠나 팬티 한 두 장, 양말 한 켤레, 치약과 칫솔 정도만 넣은, 결코 책을 넣지 않되 내 시집 한 권은 넣은, 아니, 내 시집보다는 네덜란드의 사제 헨리 나우웬이 쓴 <탕자의 귀향> 한 권을 넣은 가벼운 가방 하나만 들고 어떤 목적이나 목적지 없이 그냥 떠나는 것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에 갔다면 눈에 띄는 아무 차표나 끊어서 고속버스를 타고, 수서역이나 서울역에 갔다면 당장 떠날 수 있는 승차권을 발권해서 기차를 타고 일단 떠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곳이 그 어디든 아무 상관 없이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눈길을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깊게 잠들어버리는 것이다. 버스나 기차가 종착지에 도착해서 더 이상 달리지 않으면 느릿느릿 내려 혼자 이리저리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사 먹는 것이다. 주로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사 먹겠지만 가끔 짜장면도 라면도 햄버거도 사 먹고, 밤이 깊어지면 네온사인 불빛이 번쩍이는 곳보다 다소 허름해 보이는 모텔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으면 다시 마음 내키는 대로, 굳이 가보고 싶다고 생각되는 곳이 아니더라도 어디로 또 떠나는 것이다. 떠난 그곳에 일찍이 인연이 닿아 아는 사람이 있어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끝내 연락하지 않고 혼자 머물다가 떠나는 것이다. 혹시 영화관이 있으면 슬쩍 들어가 아무 영화나 보기도 하고, 문학관이나 박물관이라도 있으면 천천히 느린 발걸음으로 하나하나 둘러보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배를 타고 어디 먼 섬으로, 포항에서 울릉도로, 목포에서 흑산도와 홍도까지라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술은 못 먹으니까 혼자 술을 먹는 일은 없겠지만 그 섬에서는 막걸리나 소주 한두 잔 정도는 어쩌다가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술을 먹다가 누가 '어디서 왔느냐,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면 그때서야 슬며시 일어나 부둣가를 헤맬 것이다. 부두에 어른거리는 고깃배들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의 전원이 꺼져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한테서도 전화가 오지 않는 온전한 불통의 시간, 완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 지켜야 할 아무 약속도 없는 그 시간을 그대로 기뻐하면서 몇 날 며칠 그 섬의 여관방에서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할 일 업이 빈둥댈 것이다.
그래도 전화 통화라도 한번 하고 싶은 친구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면, 애타게 걱정하며 내 전화를 기다릴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런 친구와 가족이 아직 내 삶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진정 감사하되 통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그대로 빈둥대다가 더 이상 빈둥대기 스스로 민망해지면 또 다른 섬으로, 아니면 또 다른 육지의 어느 곳으로 이리저리 동가식서가숙할 것이다.
신문도 TV도 유튜브도 보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굳이 피하지는 않고 눈앞에 가판대가 있으면 한두 번 신문도 사보다가, 모텔 방에 있는 TV도 가끔 켜보다가 세상은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지구가 돌듯 그대로 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들은 굶주리지 않고, 내가 없어도 시는 누군가에 의해 여전히 써지고, 시집은 계속 출간되고, 내가 없어도 누군가에 의해 인문학을 표방하는 강연과 '작가와의 만남'과 '시노래 콘서트'가 계속된다는 사실을 또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깊게 깨닫게 되어도 조금도 섭섭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치고 힘이 들면 전국 어디든 있는 가톨릭교회의 '피정의 집'을 찾아갈 것이다. 일단 그곳에서 몇 날 며칠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미사 시간이 되어도 가는 둥 마는 둥 할 것이다. 어쩌다가 미사에 한번 참여하면 수녀님들이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뒷모습, 나처럼 피정의 집을 찾아온 이들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자꾸 쳐다볼 것이다. 수녀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숲길을 산책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산길을 하루 종일 걷다가 돌아올 것이다.
내가 너무 오래 있어 피정의 집에서 나를 좀 금치산자 정도로 여기고 싫어하는 기색이 엿보이면 또 다른 지역의 피정의 집을 찾아들 것이다. 그리하여 또 수녀님이 차려주시는 세 끼 밥을 맛있게 먹고, 수녀님들의 기도하시는 뒷모습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다가 나도 기도하고 싶으면 할 것이다. 기도하다가 눈물이 나면 울 것이다. 아직도 내게 조용히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다는 것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것이다.
그렇게 감사기도를 하는 동안 피정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동안 내가 사랑했던 산사를 찾아가볼 것이다. 운주사 와불님을 찾아가 다시 한번 일어나보시라고 부탁도 드리고, 처마바위 밑에 앉아 있는 석불님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다시 울어도 보고, 처음으로 부처님께 절을 했던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불님도 찾아가 다시 삼배를 올리고, 순천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용변을 보면서 몸속의 노폐물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모든 번뇌와 망상까지 다 버려볼 것이다.
그리고 순천까지 간 김에 가톨릭묘지에 잠든 동화작가 정채봉 씨의 무덤도 찾아가 풀꽃 몇 송이 꺾어 놓고 오랫동안 넋 놓고 앉아 있다가 일어설 것이다. 터덜터덜 무덤사이로 난 길을 내려와서 이제 더 이상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으면 녹말로 만든 친환경 유골함에 담겨 흙 속에 묻히신, 이제는 흙이 되셨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 충북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을 찾아갈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6년이나 늦게 찾아가셨지만 이제 두 분이 함께 한 흙이 되어 계신 마음이 어떠신지 여쭐 것이다. 봉분을 만들지 않고 유골함을 묻은 표지석 하나만 달랑 있지만 그래도 엎드려 절을 하고 새로 나온 내 시집을 바칠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들을 몇 편이고 자꾸자꾸 읽어드릴 것이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밤하늘에 어머니 골무 같은 반달이 뜨면 더 이상 울지는 않고 나는 또다시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그래도 여행은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완성되는 것이므로 고속버스보다 굳이 기차를 타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선뜻 집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자식들의 집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손자들을 한번 안아보고 싶어도 참을 것이다. 그냥 서울역에서 여행객이나 노숙인 틈에 끼여 대합실에 켜놓은 대형 TV를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다. 드라마가 재미없고 똑같은 뉴스가 몇번씩 되풀이해 방영되어도 멍하니 보고 또 볼 것이다. 배가 고프면 노숙인을 따라 무료급식소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천천히 남산에 올라 오랫동안 서울을 묵묵히 내려다볼 것이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돌아온 탕자'의 심정이 되어 저 '서울의 예수'가 이제 나를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을 떠올리며 "이제 주변 정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마치 의사처럼 내가 내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내 방에 홀로 틀어박혀 아직도 써야 할 시가 남아 있는지 내 가슴을 오랫동안 깊게 들여다 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써야 할 시가 없다는 것, 그것을 가장 큰 감사와 기쁨으로 여길 것이다.
출처 :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_정호승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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