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흡족하게 내리는 봄비는 아니다.
하지만, 오락가락하는 비에 삼남길 11길을 걸어볼 욕심은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울리는 몇 곡의 노래를 찾아 듣는다.
요즘 길을 걸으면 챙겨가는 막걸리를 생각하며 언젠가 올렸던 막걸리에 얽힌 추억담을 떠올렸다.
다시 읽어본다.
이광석이 부른 막걸리 한 사발이 잘 어울리는 노래인데..(재생되지 않는다!)
대신 백자의 기타 연주를 얻을 수 있었다.
막걸리 한 잔과 아버님, 그리고 대학 시절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양은 주전자와 막걸리통을 실은 짐발 자전거의 추억도..
2009년 포스팅했던 막걸리의 추억은 이렇다!
막걸리 한사발
어린 시절..
한쪽 구석에 자리한 구멍가게,
반대쪽엔 조그만 탁자 두 개가 비좁게 붙은 식당.
방 2개에 넘쳐나는 사람들
우리 집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큰 자전거에 실은
막걸리 통은 근처 주조장에서 방금 내온 것이었다.
학교가 쉬는 날이거나
학교를 파한 느즈막한 오후.
친구들은 양은주전자를 들고
부모들 심부름으로
우리 집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렇게 주전자 가득 담긴 막걸리 중
친구들 입 속으로 들어간 양도 상당하리라.(?)
손님이 나간 후
빈 자리에 남은 막걸리며 안주거리며
시키지도 않는 막걸리 잔 하나둘 나르며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홀짝거리며 들이키는 맛이
기가 찼다.
어른들은 모르겠지 하지만
벌개진 얼굴에 쓰여진 흔적은 어쩔 수가 없겠지.
한번쯤 혼낼만도 하지만
어린 아들, 딸 불러놓고
막걸리 채운 냄비를 불가에 올리며
설탕 맛도 곁들이고
달걀도 풀어 넣는다.
동생은 좋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가
술을 끓여 주는 것이
좋다고 지르는 환호성이었으니...
지금도 술을 잘 먹는 이유가 어디서 왔을까?
막걸리 두사발
대학에 합격했다고
집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님 왈 "빨리 와라!"
"왜요?"
"파티해야지."
두어시간 걸려 도착한 집엔
진수성찬(?)에 술 까지 떡하니 있었다.
오라~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
이런 기쁨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내가 배운 건 학문이 아니었고
하루 종일(조금 과장일까?) 막걸리 마시는
흥미에 푹 빠졌었다.
거기가
주점 '광장'!
이 학교를 다니는 모든 학생들이
주인 어르신을 부르길 '아버지', '어머니'하는 곳.
그냥 주인도 뭣도 없다.
들어가서 술 가져오고
안주가져오고 마시다 없으면
외상값이 빽빽이 적힌 노트 한 켠에
자랑스러운 동아리 이름.
적어주면 되고...
시도때도 없이 마시는 막걸리 문화는
'광장'에서만이 아니었다.
대강당 앞에서도 정문 앞이건
조금만이라도 앉아 있을 곳이 보이면
으레 막걸리가 함께 있었다.
대학 입학한 지 1년이 안되어 치르게 된 중간고사
그날도 '광장'에서 점심 라면과 함께 시작한 막걸리가
결국 3~4시를 넘기고 있었고..
시험을 보러 갈까 말까 하는 고민도
취해가는 술과 함께 무디어 지고 있었다.
친절한(?) 선배왈,
"시험은 꼭 봐야한다!"
"예!"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대까지 뛰었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거리.
점심 라면과 버무려진 막걸리가 적절히 배합되고
이윽고
시험장 뒤 켠 문을 열고 들어선 젊은이.
시험을 위해 부리나케 뛰어온 그 젊은이의
헌신성이 돋보일 바로 그 순간.
자리에 앉으며 바닥에 쏟아내기 시작하는 건
오전 내내 담았던 막걸리와 라면 부스러기 안주들...
시험을 보기 위해 보인 성의 정도만 기억할까?
막걸리 세사발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
술을 좋아하시는 거야 이미 적었고...
어느 정도 좋아하실까?
시골집에 내려가기 싫어하는 큰 아들에게
어느날 걸려온 전화.
"감나무 밭에 농약 좀 치자!, 이번 주말에 내려와 줄이나 잡아라!"
"예!"
일요일 오전,
트럭에 실린 장비들의 면면은
과연 감나무 밭에 농약을 할 준비들이었다.
이 쯤되면 일하는 분위기도 괜찮고..
부엌 저 쪽에서 터져나오는 실갱이
"안주가 그걸로 되겄소?" 어머님 말씀.
바라보니 조그만 접시에 담긴 고추와 된장.
그리고 큰 막걸리 두 통.
과연 그렇지..
자, 이제 출발해야지 하고 저수지 밑까지
올라가던 트럭이 잠시 멈추더니
콧노래 비슷한 소리를 내시던
아버님 왈,
"아이구, 농약병을 안 실고 왔구나!!"..ㅋㅋㅋㅋㅋㅋ...
그러면 그렇지.
농약치러 가도 농약병만한 막걸리 통은 실어도
농약병을 실지 않는 강인한 집착력!
그것이 아버님이셨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일이 20분일까, 30분일까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쉬었다 하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반가운 말씀.
당산나무 아래 연자방아 댓돌 위에 앉아서
고추 된장을 곁들여 부자 간에 나누는 막걸리 맛이라니..
아직도 난 그 당산나무 아래 불던
시원한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보기 흉하게 콘크리트로 둘러싸버린 당산나무. 다행히 연자방아 댓돌은 남아 있다!]
막걸리 한 사발 굵은 땀이 한 사발
우리들의 인생사도 한 사발
막걸리 한 사발 지난 세월이(별빛 담아서)
한 사발 우리들의 꿈 한 사발
뜨거운 가슴 이 가슴으로
자갈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어느새 굵은 열매가 열매가 열리네
썩은 땅일랑 갈아엎어야
어린 싹이 예쁘게 잘 자랄 수 있지
썩은 가지는 잘라버려야
높고 높은 나무로 잘 자랄 수 있지
나의 친구야 나의 벗들아
내가 가는 이 길을 너무 걱정하지마
세월이 가면 언젠간 너도
붉은 황토와 같은 내 마음 알아줄거야
<막걸리 한 사발_백자의 기타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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