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태지 9집을 알라딘에서 주문했습니다.
'서태지 브로마이드' 를 특별 선물로 준다기에 잔뜩(?) 기대를 했습니다.
딸은 "아빠, 정말 서태지 브로마이드 오면 붙여 놓을거야?" 라고 따지듯 물어보곤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요.
"인피니트 사진 많이 붙여 놓으면서 그러냐? 나도 붙여 놓을거다!" 하고 말했지만 정작 마음은 반반입니다.
그런데 음반과 함께 도착한 브로마이드는 9집 앨범 자켓 그림과 꼭 같은 포스터였습니다.
아니 연령대를 봐서 다른 사진을 보내주나?
어쨌든 서태지 모습이 담긴 대형 사진보다는 앨범 포스터를 안방 문 앞에 붙이게 되어 훨 편하게 되었습니다.^^
....
때묻지 않은 소녀의 표정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줍니다.
오래도록 쳐다보면 신비스러운 느낌마저 달라들고, 볼 때마다 다른 분위기를 전해오기도 합니다.
서태지의 9집 'QUIET NIGHT'는 이 신비스럽고 순수한 소녀에게 전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서태지는 소녀에게 전하는 동화처럼 편하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합니다.
안방 문 앞에 부착했던 앨범 포스터는 바로 다음날 떼어내야 했습니다. ㅎㅎ.
신비스럽고 순수한 표정은 그렇다고 해도, '무섭다'는 불만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밤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올 때 쳐다보면 '유령'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글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어 순순히 떼어내기로 했지만
큰 눈망울 소녀의 표정을 바라보는 맛이 사라진 건 못내 아쉽습니다.
2.
JTBC 뉴스룸을 보면서 그나마 위안과 희망을 본다는 서태지는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라고 노래한 come back home 의 가사처럼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팬들과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힙니다.
'희망'을 이야기할 땐 분명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쉽사리 헤어날 길을 발견하기 어려운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얼마전 블랙홀이 발표한 앨범 제목이 'HOPE' 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 맥락일 것입니다.
이전 앨범이 2005년 한국대중음악상을 수상했던 'HERO' 였음을 안다면 세상의 변화가 앨범 제목에서도 느껴집니다.
물론,
희망은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때문에 의미있다는 블랙홀과 서태지의 '희망'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언제 어디에서고 삶을 노래한다는 일이 고달프고 힘든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
이토록 세상의 진실과 진심으로 소통하게 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형식과 철학적 깊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삶을 꿰뚫어보게 되는 문예 창작이란 건 그런 것입니다.
3.
음반을 개봉해 CD 플레이어에 놓고 듣기 시작합니다.
서태지는 또 어떤 음악적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설까?
앨범 전체가 주는 컨셉에 대해서는 언론을 통해서 들은터라 만족스러웠지만 음악은 어떨까?
궁금한 마음으로 한 번, 두 번...
가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반복해서 들어봅니다.
동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녀에게 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
그런 기획의도를 살리려는 듯 대부분이 판타지한 분위기를 살리기에 좋은 전자적 사운드로 채워집니다.
솔직히 40대 중반에 들어선 저에게 전자적 사운드가 넘쳐나는 곡들은 정서적으로 친숙하질 못합니다.(ㅜㅠ.)
그럼에도,
1~2번 들었을 때의 '말랑말랑함'은 반복해 들을수록 '가사의 깊이와 잘 들어맞는 사운드이구나' 하는 만족감으로 바뀌어 갑니다.
반복해서 들으면 생기곤 하는 친숙함이 생긴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아들 녀석은 노래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CD 를 켜고 가사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흥얼거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다행히 서태지가 동화처럼 전하고 싶어했던 따뜻함은 아들에게도 편하게 전달되는 모양입니다.
4.
CD에는 9곡의 노래로 채워집니다.
한곡 한곡 좋은 가사와 의미를 찾아보며 메모를 남겨둡니다.
-소격동 : 향수와 상실
"그러던 어느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
-christmalo.win : 앨범의 타이틀곡.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느낌이 가사와 멜로디에서 잘 느껴지는 곡. 실험적인 사운드가 돋보임. 크리스마스 산타와 할로윈의 괴물의 합성어로 이중적인 모습을 나타냄.
"밤새 고민한 새롭게 만든 정책 어때. 겁도 주고 선물도 줄게. 온정을 원한 세상에."
-숲속의 파이터 : 판타지한 분위기. 동화적 느낌
-Prison Break :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구속된 우리들의 세태와 현실을 풍자.
"숨을 쉬어봐 1초만. 저 TV를 박살내. 지금 당장 시작해. Prison Break"
-잃어버린 : 일상에서 문득 멈춰서서 다시 앞 길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곡.
"잠깐만 언제였을까 나 저 멀리에 널 두고 온 걸까..... 더는 주저하지마 잠시 헤맸을 뿐인걸 절망하지마 반드시 찾아낼테니."
-90s ICON : 90년대 아이콘이었던 자신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모습과 어쩌면 주변부에서 맴돌 뿐인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주는 곡.
"눈 감은 순간 흩어지는 바람에 밀려 버려지는 당신의 삶과 같이한 너와 나의 쓸쓸한 이야기.
해답이 없는 고민 하지만 밤이 온다면 나의 별도 찬찬히 빛나겠죠."
-비록(悲錄) : 비가 나오는 가사 표현이 마음에 드는 곡. 사랑하던 사람과 갈등을 일으킨 후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
"울 것 같은 하늘이 가슴에 비를 뿌리죠. ..... 조금은 거친 비라도 좋아....."
-성탄절의 기적 : 인디언 마을을 여행하면서 썼다는 곡. 역시 그 느낌이 전해져 옴. 딸에 대한 사랑을 담은 곡으로 태교음악으로 쓰였다는..
5.
노래야 자주 들으면 친숙해질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서태지가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도 가사로 전달되어 대중의 평가를 받겠지만...
저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2년여의 준비가 왜 필요한지를 느끼게 해주는 건 조금 다른 측면입니다.
앨범은 처음 개봉했을 때 다가온 소녀의 이미지부터 연속된 동화같은 그림들.
가사가 담고 있는 정서와 곡의 분위기.
그리고, 이야기 서술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곡의 순서 배치까지!
(그런 측면에서 'christmalo.win' 과 '소격동'은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제가 놀랍고도 훌륭하게 평가하고 싶어지는 건,
'일관된 컨셉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본인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것.' 입니다.
물론 기존 형식을 깨고 또 다시 '서태지 스타일'을 추구했던 점도 크게 주목할 부분이겠으나
어른과 함께 들을 수 있는 한 권의 동화책 이라는 컨셉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서도 본인의 메시지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
서태지만의 스타일은 그런 점에서 독특하고 뛰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6.
9집 음반을 통해서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고 싶어한 서태지는 좋은 성과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각박한 시기에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여전히 '희망'을 함께 그려보자는 마음 자체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음반은 듣고 있기에 아깝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음악을 들어보면 더욱 좋겠습니다.^^
앨범에 그려진 동화 속 그림들이 무척 이쁘게 보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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