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안전학’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최근 발생하는 사고를 대하는 언론이나 현장 직원에 대한 관리 책임이 있는 회사의 태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안전불감증’이니 ‘기본도 지키지 않는 안전수준’이라니 하는 말들이 대표적이다. 책임자를 색출해 처벌하는 데 온통 관심이 있으니 정작 중요한 사후 대책은 공염불에 머물 수 밖에.
적어도 나는 대한민국의 안전전문가입네 하는 사람들이 온통 이런 ‘주류 안전학’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경험으로도 그렇다. 내가 접하는 회사의 안전관리자들은 대부분 이런 태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벗어날 관심도 역량도 없어 보인다. 오랜 기간 자리잡은 문화와 시스템의 통제, 무서운 현실이다.
<안전 경영학 카페>라는 책은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주류 안전학’의 입장을 담고 있으리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난 이런 인식에 대해 좀 더 꼼꼼한 고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만이 아니었다. 근래 접한 거의 모든 책들은 개인의 안전문화와 더불어 조직의 안전문화, 책임 추궁을 넘어 원인 규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민도 훨씬 복잡해질밖에...
왜 무슨 이유로 우리 사회는 말도 안되는 안전문화와 철학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 것일까? 적어도 전문가라는 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도 균형 잡힌 사고를 배웠을텐데 말이다. 홍성태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위험으로 부터 탈출을 위해서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느 한 기업 차원에서 백날 외치는 '안전문화'라는 게 얼마나 의미없는 소리인지 느껴진다. 그래서 '안전문화'는 온 사회가 안전에 대해 공감하는 수준이고 문화라고 정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언론에서 사고 때마다 지목되는 '부족한 안전문화'는 결국 온 사회의 문제가 사고의 본질적 원인임을 지적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안전 불감증을 벗어나는 일은 얼마나 머나먼 여정인가? 더군다나 일어난 사고로부터 털끝만큼도 배우려 하지 않은 작금의 현실을 보려니...
답답한 노릇이다.
[책에서 옮겨옴.]
모든 사고는 예방이 가능하다. ... 안전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사고로부터 예외인 사람은 없다.
<안전은 경영>
2. 2013년도 국제사회안전협회에서 발표한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투자편익 분석 결과’에 의하면 안전투자 대비 기업의 편익비용 비율이 1:2.2로 나타났다. 이는 기업이 안전에 1을 투자하면 2.2배에 해당하는 투자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로, 최근 기업이 생산성 향상이나 품질제고로 이 정도의 이윤을 내기 어려움을 생각하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국제적으로도 안전관리자의 자격요건을 자격 및 학력기준으로 정하거나, 안전관리대행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독일, 영국 등 유럽 국가 대부분의 중견기업들은 경영진으로 승진하기 위한 경력에 안전 분야를 필수로 하고, 안전관리자의 선임조건을 자격이나 학력기준으로 하지 않고 경험과 경력을 고려하고 있다.
4. 위험을 보는 것이 안전의 시작. 일터에서 발생하는 사고나 재해는 대부분 위험을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면서 발생한다. 사람이 큰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부분 하찮게 여겼던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다.
5. 드러나 있거나 잠재되어 있는 위험이 사고로 연결되기 전에 발견해 내서 위험 정도를 평가하고 그 정도에 따라 적정한 안전대책을 마련해 시행하는 것이 위험성평가이다. 결국 안전이란 위험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고, 안전관리 수준은 위험을 찾아내 평가하고 관리하는 기술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6. 작업 중 설비사고나 재해가 발생하는 경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기보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물으려는 경향의 사업장이 흔히 있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설계가 잘못된 것인지, 제작 설치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운전이나 보전의 문제인지, 작업자의 실수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원인이 정확히 규명되면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려지고, 비록 사고는 발생했어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작업자나 관리자의 공로가 무시되는 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고위험을 인지하고도 작업을 계속하게 한 관리자를 징계하고, 작업 중 사고는 발생했지만 사고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작업자를 포상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7. 산업재해는 아차사고와 같은 잠재위험성을 사전에 찾아내 개선함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 근로자는 위험한 행동이 언제 어디서 발생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공정이나 설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현장 작업자가 아차사고를 발굴하여 제안하도록 적극 권장하고, 제안된 안건을 안전보건위원회에서 검토하여 해결방안을 찾는 상향식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야 한다.
8. 인센티브 프로그램이 사고나 산업재해를 은폐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이용해 안전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설계와 시행에 근로자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 어설픈 인센티브보다 목적의식 공유가 중요하다.
9. 스태프의 안전부서와 라인의 관리감독부서가 만나서 협의하고 기술적인 대안을 만드는데는 관심이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면할 방법만을 찾는 데 급급하게 된다. 부서간 협조를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 일은 모두 문서로 깔끔하게 진행된다. 시스템이 아주 잘 갖추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10. 브래들리 모델 :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브래들 리가 개발한 조직 구성원의 행동변화모델을 듀폰에서 기업의 안전 수준과 구성원의 안전인식변화 관계로 재해석하여 안전관리수준평가 모델로 활용.
안전 수준이 아주 낮은 단계에서는 돌멩이가 날아오면 눈을 감듯이 무의식적인 자기 보호본능 수준의 안전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한 단계 올라가면 규정에 정해 놓은 대로 행동하는 규제순응의 안전의식이 자리 잡는다. 지키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거나 사규에 의해서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안전을 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알아서 독립적으로 안전을 하게 된다. 재해를 당하면 자신이 고통스럽고 가족의 생계가 걱정되어 안전을 하게 되는 단계이다. 안전수준이 높은 마지막 단계에서는 상호의존적이고 조직적인 안전활동이 활성화된다.
이와 같이 안전 수준이 높은 단계에 이른 사업장일수록 조직원이 나만 안전하면 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조직 내 동료의 안전을 챙기는 동료애를 발휘하게 된다.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부하직원의 보호구를 씌워주는 모습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11. 피터 샌드만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따르면 ‘리스크란 위험요인에 대한 국민의 분노 수준’이라는 공식으로 안전 여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안전은 기술>
12. 사고가 발생했거나 공정이 변경된 경우 위험성평가를 통해서 작업절차서를 개정하고 정비보수작업지침을 개정해야 한다.
13. 일반적으로 작업표준이나 매뉴얼은 정상운전 중이거나 표준 작업에 대하여 만들어지고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고는 정상운전 중인 설비나 작업에서보다 시운전, 비상운전, 임시운전 등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전 작업은 정상운전 시 작업과 다르게 이루어져 정상운전 중인 설비 작업표준을 따르면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있을 수 있다.
14. 협력업체가 유지보수를 위해 공정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원청업체에 하거나 급박한 위험상황에서 공정을 중단하는 조치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갑을관계로 형성된 현행 시스템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작업에 대한 사전허가를 받았을 리 없다.
15. 물적, 인적측면의 불안전이 시스템에 의한 것인지, 안전문화가 성숙되지 않은 탓인지 밝혀야 한다. ... 사고가 발생하면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사업주가 사고 발생 후 작성한 사고조사 결과를 보면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 현장을 복원시키거나 작업을 재개한 경우가 많다. 특히 작업자가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았다거나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작업한 것을 사고원인으로 하여 근로자에게 안전교육을 철저히 시키겠다는 대책을 제시한 사고조사 보고서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이러한 행태가 개선되지 않고는 동일한 사고의 반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안전은 시스템>
16. 품질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경영시스템으로 통합한 것이 품질 경영. 품질경영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국제표준규격이 바로 ISO 9001 이다. 뒤를 이어 환경분야가 경영으로 통합되면서 환경경영의 국제적 표준경영규격인 ISO 14001 이 탄생하였다.
아직 안전경영에 관한 국제표준규격은 정해지지 않았고 주요 선진국 자체적으로 인증 또는 평가규격을 제정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ISO 전 단계로 국가 간 상호 인정되는 규격으로 OSHAS 18001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안전보건공단이 KOSHA 18001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ISO는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인 ISO 45001 을 제정하여 2016년 9월 시행한다는 목표하에 2014년 5월 Committee Draft를 작성하고, 2015년 6월 12일 Committee Draft 두 번째 초안을 작성해 ISO 회원국에 의해 승인된 상태이다.
17. 서울지하철 9호선 안전관리시스템을 모범으로 제시. 업무 중 발견한 위험 상황이나 크고 작은 아차사고 등도 정해진 시간 내에 모두 종합관제로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경미한 사고와 아차사고까지 보고 받는 것은 그와 관련된 책임을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사재해 예방조치를 실질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다.
18. 안전관련 업무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경영층에 전달되기 쉽지 않다. 내용적으로 처리 또는 미처리, 적용 또는 미적용, 법규 준수 또는 위반, 안전 또는 위험 등의 이분법적 결과만 전달되기 십상이고 ‘안전문화’라는 행동 철학이 바탕이 된 안전관리를 위한 행위가 보고되고 평가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화는 안전보건이나 환경에 대한 기술력보다는 소위 ‘장표정리 기술력’이 최고 중요한 기술로 인정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존재하게 만든다.
19. HSE(Health, Safety, Environment) 부서에 대한 업무 수행 평가도 현 시점에서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면 무용론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사고가 발생하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책임론에 빠지기도 한다.
20. 기계설비나 공정과 같은 물적 요인들은 인간의 불안전한 행동 조차 사고로 연결되지 않는 구조로 설계되고 만들어져 설치되어야 한다.
21. 매뉴얼이 없거나 있어도 실제 작업에 맞지 않거나 교육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작업자가 작업절차를 숙지하지 못할 경우 사고의 원인이 된다. 표준작업 매뉴얼을 제정, 개정하는 경우 작업에 숨어 있는 위험을 찾아 수준을 평가하는 위험성평가를 먼저 해야 한다. 2003년 발생한 대구지하철 방화사고 당시 기관사는 차량 내에 화재가 발생하자 매뉴얼에 따라 차량을 정지시키고 시동키를 제거하고 운전석을 탈출했다. 그 결과 차량 내 모든 조명이 꺼지고 방송 시설이 작동되지 않아 승객들이 제대로 대피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더 큰 피해를 가져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험성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 만들어진 매뉴얼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2. 화학사고의 경우, 국민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은 사상자 수에서 오는 것보다 유해위험물질이 밖으로 나왔다는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러한 특징을 가진 화학사고를 수치적 증감만으로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사고가 증가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하고 있는 원인을 바로 보아야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23. 사고원인을 모두 사람의 부주의나 실수와 같은 의식과 태도 문제로만 돌릴 경우 본질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지심리학자 도날드 노먼은 일상기기를 잘못 다루는 것을 사람 탓으로 돌리는 타당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의 저서 ‘일상생활의 물건들에 대한 심리학’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24. 안전확보의 수단으로 Fool Proof는 인간의 불안전성에 주목한 조치이고, Fail Safe는 기계장치의 결함 가능성에 주목한 조치이다. 풀 프루프는 변속기어 D 또는 R 의 위치에 놓이면 시동이 걸리질 않거나, 일정 주행속도 이상이면 도어 시건장치가 자동 작동되는 것. 페일 세이프는 엘리베이터의 로프가 마모되어 추락하더라도 이상적으로 빠른 속도에 자동으로 잡아주는 안전장치가 작동되는 것이 예.
25. 사용자 중심적 디자인은 안전.
26.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 즉 뿌리를 찾아 규명하는 것을 Roots Cause라고 한다. ... 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작성한 사고조사보고서를 보면 사고원인으로 ‘근로자의 안전의식 부족’을 가장 많이 꼽고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을 추적하면 다른 원인이 발견된다.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 규명을 하지 못하면 사고의 재발방지대책은 묘연해질 뿐이다.
27. 사고가 발생한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다 사고 발생 전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가 더 크게 평가되는 조직문화가 성숙된다면.
28. 우연히 나는 사고는 없다. 위험은 그대로 두면 눈 내린 산비탈을 굴러 내려온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위험을 발견했을 때 바로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다.
29. 공정안전자료 작성 시 위험물질의 특성을 파악하지 않으면 위험성평가를 통해 잠재 위험의 크기와 강도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위험성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전운전절차서 작성, 근로자 교육, 비상조치계획 수립 등에 제대로 된 내용이 반영되기 어렵다. 위험은 산더미처럼 커진다.
<안전은 문화>
30.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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