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새벽을 달릴 때 보게 되는 멋진 일출 풍경이 그렇다.
일출도 모두가 같은 모습은 아니다.
비 온 뒤 깔끔함과 눈 온 뒤의 정갈함의 차이가 이채롭게 느껴진다.
붉게 물들어 오르는 여명은 하루를 지나고 보내는 일몰의 태양과도 분명하게 다름이 있다.
깨끗한 기운이 더 서늘하게 주변과 어울어진다고 할까,
어쨌든 새벽녘 피곤한 몸과 하나가 되어 감각되는 여명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내가 주로 달리는 김제·신태인 들판과 나주와 고막원, 함평으로 이어지는 들판이 그런 곳이다.
아름다운 일몰과 일출을 간혹 만나곤 하는...
...
아래 사진은 동료가 찍은 고막원역 근방의 일출 풍경이다.
폭설이 내린 며칠 뒤 날이 풀렸지만 여전히 싸늘한 기운이 새벽 해를 만나 안개를 피워 올린다.
새벽 근무에 나선 기관사의 마음이 가장 행복한 순간, 바로 그 잠깐의 순간은 사진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
이와 더불어 내가 느끼는 특별한 풍경은 이런 것이다.
설과 추석 명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을 가득 메우고 나를 기다리는 승객들 모습!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쉽지 않은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승객이 줄어버린 요즈음에는 좀처럼 사진에 담기 힘든 장면이 되었는데... 쯧...)
코로나 이전만 해도 명절이면 열차를 이용하기 위해 어김없이 역마다 사람들이 넘쳐났지 않은가.
내가 운전하는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승강장을 가득 메우고 저마다 선물보따리를 들고 행복한 웃음이 가득하다.
힘들고 어쩌고 하는 생각 따위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무언지 모를 감정이 저 아래서부터 차오른다.
"이래서 내가 이런 일을 하는거지." 하는 가슴 뿌듯함이 나를 놀라게 한다.
손을 흔들어주는 많은 승객들은 내가 흔드는 작은 손놀림에도 크게 환호한다.
짧은 순간 서로간의 대화가 오고간듯 따뜻함이 전해진다.
기관사 생활의 보람과 자긍심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이다.
이런 경험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유난을 떨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대부분의 기관사들이 내 말에 공감하고 본인의 경험을 꺼내 놓는다.
그러니 명절 새벽에 가족들을 뒤로 하고 출근해서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열차를 운전하는 일의 행복이 그런 것이다.
...
그리고, 또 한가지.
나에겐 아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즐거움이 하나 더 있는데...
아래 사진과 같은 풍경이다.(ㅎㅎㅎ.)
엥, 이게 무슨?!
...
보통 6량이나 8량, 10량 정도로 구성된 무궁화호나 새마을열차는
열차가 정지해야 할 위치를 아래와 같은 표시로 알려준다.
(고속열차도 이와는 약간 다른 모양이지만 마찬가지로 정지목표를 사용한다.)
'정지'라고 적힌 표지 밑을 참고하여 기관차의 위치,
정확하게는 '기관사의 어깨'를 8과 6과 같은 위치의 표지에 맞추라는 표시이다.
즉 어깨선과 나란하게 일치시키는 것인데,
실제로는 -고정편성이 아닌- 일반 열차의 공기제동 특성과 외부 날씨 영향, 매번 달라지는 유동적인 편성 등을 감안할 때
충격을 최소화해 정확하게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보통은 정지 목표 주변에서 약간씩의 편차를 두고 정차하게 된다.)
그러니 위의 사진과 같이 표지에 적힌 글자를 기관사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어깨선과 나란히 정차시키는 경우는
제동을 취급했던 기관사 자신조차도 놀라게 만드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거의 달인급이라고 해야 할까 ㅎㅎ.
길고 육중한 열차가 정지목표를 향해 빨려 들어가는 느낌, 생각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오죽했으면 꺼두었던 휴대폰을 부랴부랴 켜고 촬영을 했겠는가.^^)
동료들은 '신의 경지'라고 농담을 건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기관사 일은...
매일처럼 정지목표에 정차하기 위해 수 없이 노력을 해보지만,
우연처럼 정지목표에 정차해버린 상황에 오히려 놀라는 일이겠다.
...
하하하,
정지목표에 열차 세운 일을 두고 이런 호들갑이라니... 나도 참!!
(2021년 2월 초순)
또,
(3월 28일 덧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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